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큰글자책] 황정견 시사선

[큰글자책] 황정견 시사선

황정견 (지은이), 오태석 (옮긴이)
지식을만드는지식
36,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36,000원 -0% 0원
1,080원
34,920원 >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11st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G마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서점 유형 등록개수 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큰글자책] 황정견 시사선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큰글자책] 황정견 시사선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외국시
· ISBN : 9791128869556
· 쪽수 : 278쪽
· 출판일 : 2023-05-15

책 소개

송나라의 대표 시인 황정견(黃庭堅)의 시 36수와 사(詞) 12수를 엄선해 소개한다. 황정견은 시를 짓는 데 독서와 학문을 중시하고 성리학과 선학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했으며, 시어를 부단히 연마해, 서정적이고 운율 중심인 당시(唐詩)와는 달리, 철리(哲理)적이고 사변적인 송시(宋詩)의 기틀을 정립했고,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원조가 되었다.

목차

황정견 시(詩)
절벽 아래서 시를 풀어내다
청명
바둑 2수를 임공점(任公漸)께 드리며 제2수
유민(流民)의 탄식
고시 2수를 소자첨께 드리며 제2수
막걸리 제1수
고양이를 구하며
지구(池口)에서 비바람으로 사흘을 머물며
낙성사(落星寺)에 제해 제3수
새소리에 화답해
원명 형이 자유에게 차운한 시에 대해, 나 역시 차운해 자유께 보내 드리다
쾌각에 올라
영신(永新)현령이 석이버섯을 보내온 데 답해
연아(演雅)
황기복에게 보내다
왕형공의 〈제서태일궁벽〉 시에 차운해 제1수
전목보의 〈영성성모필〉 시에 화답해
소자첨(소식)의 시구는 일세를 풍미하는 훌륭한 시다. 그런데 〈송양맹용(送揚孟容)〉 시는 황정견의 시체를 흉내 내어 지었다고들 말한다. 이는 자첨이 마치 한퇴지(한유)가 맹교나 번종사(樊宗師)를 본떠 희작(戱作)한 것과 같으니, 문자 놀이를 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후생들이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를까 걱정해 차운한다. 자첨의 〈송양맹용(送揚孟容)〉 시 “우리 집은 아미산, 그대와 같은 지방(我家峨眉山, 與子同一邦)”에 차운하며
쌍정(雙井)의 차를 자첨에게 보내며
공의보(孔毅父)에게 재미 삼아 지어 보내다
자첨이 〈동생 자유의 〈한간의 그림을 보고〉 시에 화답한 시〉에, 다시 차운해 이백시(李伯時)의 〈천마도(天馬圖)〉 그림을 논하는 시를 쓰다
정방(鄭防)의 화집(畵集)에 제1수
자첨의 〈곽희의 추산도(秋山圖)〉 시에 차운해
대나무, 바위, 목우(牧牛)
자첨이 홍대를 왕선의에게 보낸 시에 차운하다
자첨의 〈고목(枯木)〉 시를 화두로
심명각(深明閣)
황빈로(黃斌老)의 ‘병상에서 일어나 혼자 동쪽 뜰을 거닐다’ 시에 차운하며
석칠삼(石七三)에게 차운하며 제6수
개미와 나비 그림
소동파의 〈이량공(李亮功) 귀래도(歸來圖)〉의 제시에 추화(追和)하며
고자면(高子勉)에게
자첨의 화도시(和陶詩)에 발(跋)하며
비바람에 악양루에 올라 군산을 바라보며
마애비문을 보고서
의양(宜陽)에서 원명(元明) 형과 작별하며 ‘상(傷)’ 운으로 쓰다

황정견 사(詞)
청평악·봄은 어디로 갔나
남가자
망강동
완랑귀
정풍파
염노교
자고천
소충정
목란화령
수조가두·유람
청옥안
남향자

해설
송대 문학 연표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 후기
옮긴이에 대해

저자소개

황정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북송 건립 85년 후인 인종 경력 5년 홍주부(洪州府) 분녕현[分寧縣, 현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 슈수현(修水縣)] 수수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및 형제들은 진사에 오르기도 했고 또 북송의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운동가인 구양수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또 부친 황서(黃庶)는 두보를 존경해 그 영향이 황정견에도 이어졌지만, 황정견이 열네 살 때 작고했다. 이후 가세가 기울자 그는 명망가인 큰 외삼촌 이상(李常)에게 의탁했다. 이후 구파의 손각(孫覺)의 딸과 결혼했으나 9년 만에 사별했고, 북경국자감교수(國子監敎授)로 있던 1072년 다시 사경초(謝景初)의 딸과 재혼했지만 역시 7년 후 사별했다. 두 번째 장인 사경초는 양주통판과 둔전랑을 지낸 관리여서 황정견은 그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1064년 19세에 황정견은 중앙 정부의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한 번 낙방했다. 그리고 1067년 23세에 예부시에 다시 응시해 삼갑 진사제에 급제하고, 하남성 여주(汝州) 섭현위(葉縣尉)를 필두로 관직에 나섰다. 신종 희녕 5년(1072, 28세)에는 학관 고시에 합격해 국가의 최고 학부인 국자감의 교수가 되었고, 북경에 있을 때인 원풍 원년(1078, 34세) 구파의 천재적 문인인 소식과 교유를 시작하면서 그와 줄곧 정치적 운명을 같이했을 뿐 아니라, 소문 사학사(蘇門四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북송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080년 황정견의 정치적 후견인인 소식은 왕안석 신법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왕안석 신파에 의해 ‘오대시안(烏臺詩案)’의 문자옥에 걸려 호북성 황주(黃州)로 유배를 갔고, 황정견 역시 길주 태화현(현 장시성 타이허)의 지사로 좌천되었다. 임지로 가는 도중 안휘성 서주 삼조산 산곡사(山谷寺) 석우동(石牛洞)의 경치에 반해 ‘산곡도인(山谷道人)’이라고 자호했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구파인 소식의 입각으로 이상, 손각, 소철(蘇轍), 황정견, 조보지(晁補之), 장뇌(張?), 진관(秦觀) 등이 수도 개봉(開封)에서 관리 생활을 하게 되었다. 황정견은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1085, 41세), 신종실록검토관(神宗實錄檢討官), 집현교리(集賢校理)(1086), 저작좌랑(著作佐郞)(1087)을 지내며 1091년까지 원우 연간에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이후 1093년 소식은 다시 좌천되어 광동성 혜주(惠州), 해남도(海南島) 등 장기 유배의 길을 걷게 되었고, 황정견 역시 사천성 검주(黔州)까지 쫓겨났다. 황정견은 1101년의 소식의 사후 정치적 박해 속에 유배를 다니다가, 1104년 봄에는 동정호를 지나 곳곳을 거쳐 여름에 의주(宜州)에 도착했고, 이듬해인 숭녕(崇寧) 4년(1105) 9월 30일 61세를 일기로 귀양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 역시 동시대의 다른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의 신법을 둘러싼 치열한 당쟁 속에서 풍랑을 겪어야만 했던 쉽지 않은 삶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자신의 내면을 기록한 시사(詩詞)와 산문과 서예를 역사 속에 남겨 놓았다.
펼치기
오태석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타이완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방문학자(1989), University of Washington Visiting Scholar(1999), 중국 저장대학교 방문학자(2009), 제주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방문학자(2016)를 역임했다. 교육 이력은 경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부교수, 동국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문과대학장, 중국학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다. 연구 활동으로는 한국이론문학회 회장, 한국중국어문학회 회장, 중국어문학회 회장, 한국중국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2016년 인문 기반 융합 연구를 지향하는 한국동아시아과학철학회를 창설해 회장으로 있다. 저서는 《황정견 시 연구》(1991), 《중국 문학의 인식과 지평》(2001), 《중국 시의 문예 심미적 지형》(2014), 《노장 선역, 동아시아 근원 사유》(2017), 《시공간의 인문학》(2020)이 있으며, 교육부 우수 성과에서 총 3회(2012, 2015, 2020) 장관 표창을 받았다.
펼치기

책속에서

유민(流民)의 탄식

북방엔 근년 비다운 비 내리지 않아
오곡은 결실 없고 세월만 허송했다
요즘은 한밤에 지진 일어나
대지를 받쳐 주는 큰 자라 삼산(三山)을 다시 받치려고 떠다니네
담벼락 무너지고 기둥 부러져 노약자 깔리고
원성이 가라앉기도 전에 홍수가 연이었다
땅 갈라지고 물 솟구쳐
열 집 중 팔구 호는 물에 떠내려갔지
듣기에 전연(澶淵)에는 강 건너는 이 하루에 수만이나 되어
하북에 빈 고을 얼만지 알 수가 없을 정도라지
양성과 섭현에는 봇짐 행렬 줄을 잇고
거처는 없고 경작할 소도 구하지 못해
먼저 온 이들 그래도 황무지나마 얻었지만
아! 뒤에 온 이는 무얼 의지할까?
자사(刺史)와 수령(守令)은 진정으로 힘써 백성과 함께 근심을 나누고
황제는 조서를 내려 부모와 같이 애달파한다
조정에선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같은 명재상을 썼다는데
언제나 직접 눈으로 민생을 살필까?
치수의 대계획은 쉬이 정할 일이 아니지만
시중에 떠도는 말은 없는 호랑이도 만들지
계속되는 재해란 애당초 예고가 없는 것
요임금의 수재나 탕왕의 가뭄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
제나라 환공(桓公)의 질병은 처음엔 증세가 없었지만
편작(扁鵲)이 진(秦)으로 떠나간 뒤의 치료는 이미 때늦었다
한 움큼의 아교로 황하가 맑아지길 기다리려나?
한 소쿠리 음식으로 백성 어찌 먹일거나?
그래도 아직은 이 봄을 넘겨야 하니
주공의 구황(救荒) 십이책을 강구해야 하리
많은 선비들 책략 기기묘묘한 이때에
노생의 비법을 한번 들어 보시게!


流民歎
朔方頻年無好雨, 五種不入虛春秋.
邇來后土中夜震, 有似巨鰲復載三山游.
傾牆摧棟壓老弱, 寃聲未定隨洪流.
地文劃劙水觱沸, 十戶八九生魚頭.
稍聞澶淵渡河日數萬, 河北不知虛幾州.
累累襁負襄葉間, 間舍無所耕無牛.
初來猶自得曠土, 嗟爾後至將何怙.
刺史守令眞分憂, 明詔哀痛如父母.
廟堂已用伊呂徒, 何時眼前見安堵.
疏遠之謀未易陳, 市上三言或成虎.
禍災流行固無時, 堯湯水旱人不知.
桓侯之疾初無證, 扁鵲入秦始治病.
投膠盈掬俟河淸, 一簞豈能續民命.
雖然猶願及此春, 略講周公十二政.
風生群口方出奇, 老生常談幸聽之.


황기복에게 보내다

나는 북해에 살고, 그대는 남해에
기러기 편지 전하려 해도 방도가 없네
복사꽃 춘풍에, 한 잔의 술
강호의 밤비에, 십 년의 등
집에는 오직 네 벽만 있어
간난을 고침에는 세 번이나 팔뚝을 부러뜨리지 않아도 되지
생각하니 학문에 머리는 하얗게 세었겠지
강 건너 원숭이 울음소리에 남방의 장독 피어나는 등나무 숲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이 포스팅은 제휴마케팅이 포함된 광고로 커미션을 지급 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