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폴리트 표도로비치 보그다노비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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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년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열 살 무렵 모스크바로 보내졌고, 이후 최고 재판소의 부속 수학 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시, 음악, 그리고 연극에 관심을 보였던 보그다노비치는 미하일 헤라스코프(М. М. Херасков)와 가까워지게 되었고, 그의 승인을 받아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했다.
1760∼1762년 보그다노비치는 헤라스코프가 발간하던 문예지 ≪유익한 유흥≫에 동참했고, 여기에 여러 편의 자작시를 문예지에 실었다. 이 시기 그는 파닌, 다슈코바 등의 인사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특히 다슈코바의 후원을 받아 ≪보잘것없는 습작≫이라는 문예지를 발간했다. 그러나 이 문예지는 약 6개월 정도 발행되었다가 이내 폐간되었다.
1766년 페테르부르크로 넘어가 외무성에서 통역관으로 일했고, 드레스덴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약 3년 동안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그 후 러시아로 돌아와 외무성에서 계속 근무했다. ≪저녁≫, ≪러시아 문학 애호가들의 지침서≫, ≪월간 신작들≫ 등의 문예지에 공동 편집진으로 참여했고, 서정시, 송시, 시편이나 목가시를 번역해 기고했다.
보그다노비치는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이내 18세기의 가장 유명한 저술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가 편집한 문예지인 ≪보잘것없는 습작≫은 볼테르나 엘베시우스의 저술들을 매번 번역해 지면에 실었다. 이 문예지 1호에 그는 <신분 평등에 대한 연설>이라는 시와 볼테르의 <리스본 지진에 대한 시>를 실었다. 이들의 작품들은 인류에 대한 사랑을 표방하면서 관념론적 낙관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765년 그는 교훈적 서사시의 전통을 이어 가며 세 편의 단시로 이루어진 서사시 ≪더없이 큰 행복≫을 출판했다. 이 작품은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며 가장 기본적인 보편적 행복은 물질적 평등과 사유 재산의 부재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보그다노비치는 1773년에 ≪리라≫라는 시집을 출간한다. 이 시집에는 국민의 행복이 자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프랑스 작가 마르몽텔 작품들의 번역본과 보그다노비치 본인의 자작시들이 포함되었다. 그는 <꿀벌과 호박벌(Пчёлы и шмель)>이라는 우화에서 일을 하지 않고 즐기기만 하는 귀족들을 수벌(게으름뱅이)에 비유하며 비판했다. 그러나 푸가초프의 난 이후로는 그의 저작에서 사회 개혁적 모티프가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견지하던 자유사상에서 한발 물러서며, 궁중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1780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문서국에서 근무한다. 1775∼1782년에는 정부 기관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통보≫를 발행했다. 1785년에는 예카테리나 2세의 칙령에 따라 ≪러시아 격언들≫이라는 작품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 작품집에서 러시아 민속 문학은 정부 차원에서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민중의 신앙심과 정중함을 입증하는 사례로서 사용될 뿐이었다. 보그다노비치는 격언의 슈제트를 바탕으로 희곡과 서정적인 희극인 <두셴카의 기쁨>을 썼지만, 독자층으로부터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질 못했다. 1786년에는 투만스키와 공동으로 문예지 ≪세계의 거울≫을 편찬한다. 1788년에는 문서국장의 자리를 맡는다. 1796년에 퇴임한 후 쿠르스크로 이전한다. 그곳에서 그는 1803년 1월 6일(18일) 쿠르스크에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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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슬라브어문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명예교수이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학술위원을 지냈다.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조지아 대통령에게서 상과 명예훈장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죄와 벌의 현대적 해석』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호피를 두른 용사』,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검찰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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