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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55114377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15-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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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맛보기]
멀리서 보기에도 난야가 준비한 마차는 화려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곳곳에 박힌 보석으로 숨이 막힐 듯 반짝거렸다. 마차를 끄는 말도 훌륭했다. 서는 자한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는 그녀를 귀빈으로 대우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서의 동행인은 마부 한 사람뿐이었다. 사실 포로 송환에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녀는 불평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제야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해가 하늘 정중앙에 자리 잡을 때까지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이윽고 제국과 왕국의 경계선에 말이 멈춰 섰을 때, 멀리서 왕국으로부터 보낸 가마 행렬이 다가왔다.
가마 행렬 역시 조촐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새하얀 말을 타고 무장을 한 채 나타난 젊은 미남자였다. 그는 일행과 함께 마차를 둘러싸더니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왕국의 사람이 아닌 것일까? 서는 긴장해서 마차에 난 작은 창을 흘끗거렸다. 하지만 순백의 말총이 흩날리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그 외의 것이 있다면 침묵.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그런 고요함이었다.
서는 이들이 왕국에서 보낸 가마 행렬이 아니라 산적 떼와 같은 야만인들이리라 생각했다. 분명히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제국과 왕국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벌써 이 세대 전의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왕국이 제국에게 신하의 나라 취급을 받고, 매해마다 공물을 바치던 것도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접경지역에서의 평화를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가 볼모로 간 이후로는 그런 일이 더 이상 없었다.
모든 것은 호의 외교능력 덕택이었다. 그가 보위에 오른 이후부터는 일방적인 조공은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또 자한 역시 그런 호의 의사를 존중했다. 어째서인지 정확하게 이유를 밝힌 적은 없어도 대신들은 서 덕택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곤 했다.
한데 이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위협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아니면 이들은 정말로 야만인일까.
서는 두려움과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상황을 분석하려고 애썼다.
“사치스럽기 짝이 없군.”
그때였다. 서가 이들 무식한 무리에서 빠져나갈 지혜를 짜내던 그 순간.
미남자의 차디찬 음색이 마차를 뒤흔들었다. 경멸을 가득 담고 있는 그 목소리에 서가 집중하는 동안 침묵이 물러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천천히 몰려들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음성이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마차 손잡이를 치장한 보석만 해도 우리 궁에서 가장 늙은 내관의 녹봉과 맞먹겠구먼. 황제의 첩 노릇은 상당히 수지가 맞는 장사인 모양이야. 하지만 천박해 보여. 우리 왕궁의 국고는 이만한 대우를 해 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말이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의정?”
호였다. 서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반가움이 앞서야 했으나 그가 냉담하게 지껄이는 오해 일변도의 말에 이내 그녀는 섬뜩해졌다.
“전하.”
서가 조심스럽게 그의 오해를 고쳐 주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호는 매정하게 그녀로 하여금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우의정 황 대감이 대답하는 말을 경청했다. 서가 소문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 같으며 자한의 창녀나 다름없다는 견해였다.
우의정의 이야기는 서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호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는 호가 황 대감의 무식하고 막돼먹고 부당한 평가를 믿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호야말로 그녀가 포로에서 석방되도록 앞장선 장본인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가 왕위에 오르고 제국과 왕국의 관계를 개선하자는 의미에서 가장 먼저 청한 것이 포로를 돌려받는 것이라고 들었다. 특히 왕족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서만큼은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명했다고 했다. 서는 그 말을 의심치 않았다. 그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버팀목이었다.
“전하…….”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서가 다시 입을 뗐다. 그러자 그녀의 말을 자르고 높고 질질 끄는 듯한 긴 음성이 들려왔다.
“어명이오.”
어명? 서는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연씨 가문 서의 왕족 자격을 박탈하고 적국의 황제를 받든 것은 잠재적인 역모로 보는바, 이 순간부터 연이라는 성을 빼앗고 성씨가 없는 무수리로 입궁해 백 오십 년 동안 후궁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라는 어명이오.”
“전하!”
서는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소리는 이내 박차를 가하며 되돌아가는 말발굽소리에 묻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