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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56345558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23-09-03
책 소개
목차
서문 _ 헐렁함의 품격 4
지고교수 초대 수필
이명지 _ 스승, 오창익을 만나다 11
술 익을 때 더 그리운 당신 18
전혜경 _ 언제까지 살아야 안 미안할까 33
동지 38
일 자체가 남을 돕는 것 43
즐거운 나의 집 48
초행길 53
통제 구역 57
지레짐작 63
희망의 상징 68
행복하게 사는 법 74
이수진 _ 그 처녀의 맷돌짝 81
헤이, 부라더 86
끌림과 당김 91
내가 대신 싸워줄게 96
요즘 연애 102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 106
정상 참작 112
그냥 들이대 118
가면을 벗고 123
서희정 _ 나의 스승과 피아노 131
외간 남자 136
인생 연주 141
공기청정기 149
사람 백신 154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158
늙은 호박 라떼 164
인어공주의 세상 168
손병미 _ 우물에 빠진 아이 177
소풍 181
그때는 몰랐다 185
기회 189
나도 남자 있다 193
독일에서 만난 남자 199
나를 위한 밥상 204
소꿉놀이하고 싶은 나이 209
난 바람이 좋다 214
허용되는 사이 219
이원환 _ 점과 점선 225
단풍나무 그늘 아래서 230
증기기관차와 캐딜락 236
3% 문화비 243
1분 주례사 248
작명례 253
이별이 준 선물, 마라톤 258
시간 없다 말 못해 264
나이가 들면 왜 시간이 빨리 가는가 270
최석호 _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277
내가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281
신의 미끼 286
누가 나를 아는가 291
깊은 인연 296
바람 300
손이 가면 마음도 따라간다 304
발문-민혜 _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308
책속에서
시차가 무색할 만큼 잘 자고 눈을 떴다. 어제 늦은 밤, 깊은 어둠 속에서 만났던 숙소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를 백설 공주로 착각하게 했다. 왼쪽 창을 통해선 넓은 초지가 시원하게 보이고 뒤편 창을 통해선 소나무 숲이 보였다. 넓은 마당에는 사과나무 몇 그루가 있고 금방이라도 일곱 난쟁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 작은 집이 두 채나 있었다. 남편과 동행하여 날아온 독일에서의 첫 아침은 마치 동화 속 같았고, 모든 세포가 깨어나는 듯 아름답고 활기차 신이 났다.
오랜만에 맛보는 갓 구운 독일 빵과 커피 덕분에 한껏 마음이 들뜬 나, 오늘은 혼자 기차를 타고 지인을 만나러 슈투트가르트로 가는 날이다. 서둘러 도착한 역에는 선로만이 길게 누워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시골 기차역에 서 있으려니 용기가 필요했다. 낯섦의 시작은 입김이 뿜어 나오는 차가운 공기와 덩그러니 혼자 서 있는 표 파는 기계와의 대면이었다. 그렇게 고독한 기차 여행 끝에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여 예전에 함께 노래했던 합창단 지휘자 선생님을 만나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반가움만큼이나 파란 가을 하늘 아래에서 한국인 건축가 이은영의 작품인 시립 도서관에 갔다. 하얀 벽면이 나까지 창백하게 만드는 듯도 했지만 멋진 공간 활용은 역시 상을 받을만하다는 인정을 하게 했다. 탄성을 지르게 하는 벤츠 박물관에도 갔다. 지금은 흔하디흔한 것이 자동차지만 그 옛날의 차들은 뮤지엄에 전시될 만큼 가치가 있는 예술품이었다. 그 크기와 색감에 놀라며 차의 역사와 함께한 세계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다가 나는 살짝 시간이 길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는 것인지, 예매한 기차 시간을 3분 지난 후에야 기차역에 도착했고 선로는 텅 비어 있었다. “뭐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 시간과 돈이 더 드는 만큼 경험도 쌓이겠지. 그거면 됐지.”라며 개폼을 잡았다. 다행히 추가되는 요금없이 다음 기차 편을 예약하고, 물 한 병을 사서 마시며 천천히 역을 구경하며 다녔다. 여기까지가 나의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마치 태풍 전야처럼 평화롭게 말이다.
환승을 한번 해야 하는 다음 기차를 타고 안내 전광판이 바로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안내 멘트와 함께 갑자기 사람들이 내리는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이 기차는 취소되었고 삼 번 플랫폼에서 다른 기차를 타라는 뜻인 것 같았다. 황급히 안내센터로 갔지만 줄이 너무 길었다. 딱 한 곳뿐인 매표원이 있는 창구도 줄이 길고, 기차는 곧 떠날 것 같고. 조급한 마음에 일단 기차를 탔다.
두리번거리다 여행객이 아닐 것 같은 모습인 넥타이를 매고 있는 신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나의 목적지까지 가는 기차인지 물어보니 갈아타야 하는 환승역 이름을 알려주었다. 혹여나 내가 지나칠까 두려워 종이를 내밀고 역 이름을 써달라고 했다. 그 종이를 쥐고 역 이름을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머릿속에 저장했다. 신사는 좋은 여행 하라며 떠나가고 나는 전광판에 눈을 고정하고 앉아 있는데, 마음이 이상하게 싸했다.
꽤 많은 역을 지나왔는데 싶어서 스마트폰을 켜고 노선 검색을 하려다 보니 남은 배터리가 19%에서 14%가 되더니 금방 9%로 떨어져 버렸다.
_본문 손병미 ‘나도 남자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