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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56410379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15-11-27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1.
2.
3.
4.
5.
6.
7.
8.
9.
10.
11.
12.
에필로그
저자소개
책속에서
“지영 씨는 오랜만이군요.”
6개월만의 조우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존댓말로 그녀에게 선을 그었다. 지영도 사무적인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봤다.
“오랜만이에요.”
공 선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는 사이에요?”
“어쩌다 보니 알게 됐죠.”
영후는 영리하게 정확히 뭘 하다 어떻게 만났는지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지영은 참담한 심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여기서 먼저 빠져 나가고 싶었지만, 하늘같은 교수님과 선배가 있는 자리라 마지막 뒤치다꺼리를 그녀가 해야 했다. 그러니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지영은 선배와 영후가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유행이 굉장히 빨리 돌아요. 새로운 신소재의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고 해도 소비패턴의 변화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서 소비자들의 취향을 따라 잡을 수가 없을 지경이에요. 요새는 신축건물 문의보다는 리모델링 문의가 더 많아요. 그러니까 좀 더 특별하고 독특한 기와를 찾는 손님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죠.”
신소재 개발의 시간을 더 당기려면 연구원을 더 고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발팀을 한 개의 팀이 아니라 여러 팀으로 분할해 운행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빠르고 변덕스러운 소비를 재빠르게 포착해 계약을 성사시키려면 그런 부분에서도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소재공학부 학생들이 취업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시장 상황이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년이면 지영 씨는 4학년이 되죠?”
“네, 그렇죠.”
“취업할 곳은 마음을 정했나요?”
영후의 난데없는 질문에 지영은 마음속으로 정해 두었던 대답을 했다.
“‘기문요업’쪽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기와 쪽으로는 영후의 집안이 경영 중인 ‘연성요업’과 양대산맥인 ‘기문요업’은 기와전문업체로서 입지를 탄탄히 하고 있다. 연성보다는 3년 정도 업계에 늦게 들어간 후발주자임에도 빠르게 성장세를 보인다.
“왜 기문인가요?”
“경쟁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고, 나이 지긋한 분들이 여전히 퇴직을 하지 않고 일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연륜 많은 그분들의 노하우를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테니까요.”
영후의 눈썹이 슬쩍 비틀어졌다. 마뜩잖아 죽겠는 얼굴로 지영을 쳐다봤다. 노골적으로 시위를 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연성을 두고 기문으로 가겠다는 오기 섞인 대답을 할 리가 없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백 교수가 가만히 지영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후훗, 영후에게 빈정이 상한 게로구만. 영후야, 뭔지 몰라도 우리 지영이 기분을 풀어 주지 않으면 절대로 네 회사에는 가지 않을 것 같다.”
“선배님!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윤지영 씨가 아니어도 인재는 세상에 널렸어요.”
지영이 쓰게 조소했다. 그의 말은 너무도 딱 맞았다. 하지만 그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그녀의 귀에는 ‘너 따윈 필요 없어!’라는 소리로 들렸다.
지영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두 잔, 석 잔, 술이 술을 불러들이더니 어느 순간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녀가 일렁거리는 시야를 훑어 영후를 쳐다봤다. 영후의 얼굴이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차영후 씨! 댁이 그렇게 잘났어요!”
빽지른 소리에 다들 경악해서 지영을 쳐다봤다. 영후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영이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다. 그가 재밌다는 듯 입술 끝을 보이지 않게 휘더니 물었다.
“주사가 있나 보군요.”
지영이 반쯤 풀린 눈으로 다시 한 번 그에게 소리쳤다.
“재수없다고! 너어어어!”
그러더니 물 컵을 들어 그의 얼굴에 짝 뿌리고는 그대로 뒤로 발랑 넘어갔다. 넘어가는 그녀를 받은 사람은 한 선배였다. 한 선배가 매우 당혹스러운 얼굴로 영후를 쳐다봤다. 백 교수가 낄낄거리더니 손사래를 쳤다.
“영후야! 그 말썽꾼 좀 데리고 나가라. 우린 좀 더 마셔야겠다.”
영후가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 지영을 번쩍 안아올렸다. 연구원들이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교수님,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지영이 이사갔는데, 위치는 아나?”
“차에 눕혀 놨다가 깨면 집에 데려다 주죠. 굳이 그런 친절까지 베풀 이유는 없으니까요. 가보겠습니다.”
“술값이나 내고 가게. 아주 넉넉히!”
“이 와중에도 너무 하시잖아요? 선배님!”
영후가 통박을 놓고 투덜거리며 룸을 빠져 나왔다. 그는 완전히 녹다운되어 시체처럼 늘어진 그녀를 차로 데려가 뒷좌석에 눕혔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영후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그녀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재수없다고? 너, 정말……!”
욕을 해주고 싶은 걸 참았다. 먼저 열 받게 한 사람이 누군데? 그녀가 기문요업을 입에 담는 바람에 가장 화가 난 사람은 그였다. 그렇게 시비를 먼저 걸어놓고 재수 없다니? 골이 난 그는 바로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인근 호텔로 그녀를 끌고 갔다. 발레파킹을 맡긴 그는 그녀를 등 뒤에 업고 룸을 하나 잡았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층수를 누른 그는 되도록 이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 많기를 빌었다. 지영이 평생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다. 다른 회사에 가게 둘 바에는 이대로 양 날개를 분질러 그의 곁에 가둬 놓는 것도 대안이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커다란 룸이 아니라 일반 룸으로 계산했다. 하룻밤 성의 없이 보내는데, 굳이 큰돈을 들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이 또한 심통이다. 그는 침대에 지영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지영이 내동댕이쳐지기 무섭게 앓는 소리를 하더니 중얼거렸다.
“정말 싫어…… 차영후…… 제일 싫어.”
가만히 듣고 있던 영후가 이맛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나도 만만찮거든! 나도 싫어. 너…….”
그때 지영의 휴대폰이 울어댔다. 영후는 핸드백으로 손을 뻗어 지퍼를 열고 휴대폰을 들었다. 지홍의 전화였다. 그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누나, 몇 신데 여태껏 집에 안 와? 12시가 다 되어가는데?]
“오랜만이다, 지홍아.”
[누구세요?]
“나, 차영후…….”
[아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왜 누나가 전화를 안 받고 형이 받아요?]
“누난 잠깐 화장실에. 지금 연구원들하고 술판이 거하게 벌어져서 정신이 없어. 내가 적당히 술이 깨면 누나 데려다줄 테니까, 먼저 자라.”
[누나, 많이 취했어요?]
“그렇게 많이는 아니고, 적당히……. 그래도 술 깨려면 두 시간쯤은 걸리지 싶어.”
[알았어요. 저 먼저 잘 테니까, 우리 누나 안전하게 데려다 주세요.]
“그래.”
[참, 형…… 며칠 전에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아마 누나가 더 속상할 거예요. 누나가 그런 얘길 안 할지도 모르겠어서 제가 대신하는 거예요. 혹시 누나가 형한테 못되게 굴면, 조금만 봐주세요.]
“아…… 미안하구나. 연락을 받지 않아서 못 갔어. 많이 힘들겠구나.”
영후는 당황해서 뭐라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잠시 멍한 얼굴로 지영을 쳐다봤다.
[괜찮아요. 엄마가 꽤 오래 앓았잖아요. 의식도 없고, 기억마저 없는 상태인데 계속 사는 게 사는 건지, 어떤 땐 좀 헷갈리더라고요. 그래도 마지막엔 좀 얘기라는 걸 할 수 있기를 희망했는데…… 그냥 가셨어요. 우리한테 억울하다는 말 한 마디 못 하고……. 그게 너무 분해요. 형…….]
“그래, 그렇겠지. 경찰 측에서는?”
[못 찾았어요. 아무래도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아요.]
영후는 깊게 한숨을 쉬고 누나는 맡겨 달라 말한 후 통화를 끝냈다. 그는 비통한 얼굴로 지영을 쳐다봤다. 그런 일이 생기면 연락은 할 줄 알았는데, 이 독한 여자는 그를 찾지 않았다. 기어이 끊어야만 하는 존재인 건가?
“윤지영…… 그런데 웃기지? 난 하지 말라니까 더 해보고 싶어지는데? 너랑……. 형이 안 된다고 하고, 너도 싫다고 하는데 난 그 선을 넘어가 보고 싶어진다. 근데 너, 왜 이렇게 못됐니?”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지영의 칼 같은 행동이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곁에 드러누워 팔베개를 해줬다. 그리고 그녀를 품안에 꼭 끌어안았다.
“엄마 일은…… 안 됐다. 그렇게 살려보려고 아등바등하면서 너의 인생에 가장 치명적인 오점까지 남겼는데…….”
그렇게까지 했는데 엄마를 구하지 못한 지영의 심경은 어떤 걸까? 그는 가만히 그녀의 이마와 머리카락에서 나는 체취를 맡았다.
“……데려다주기 되게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