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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 ISBN : 9791158545703
· 쪽수 : 336쪽
· 출판일 : 2025-06-05
책 소개
목차
발간사 / 인사말씀 / 축사 / 정평공 유사 서문 / 정평공 유사 / 정평공 유사 후기 / 사적(事蹟) / 보유(補遺) / 판삼사사 손공에게 지팡이를 내린 시의 서문
시詩
1. 이인복(李仁復) / 2. 정사도(鄭思道) / 3. 이색(李穡) / 4. 최맹손(崔孟孫) / 5. 이달충(李達衷) / 6. 전녹생(田祿生) / 7. 성사달(成士達) / 8. 염흥방(廉興邦) / 9. 권중화(權仲和) / 10. 박중미(朴中美) / 11. 탁광무(卓光茂) / 12. 설장수(?長壽) / 13. 강호문(康好文)
지팡이를 내린 명 / 발(跋) / 진영의 서문 / 봉안과 이안
〈유허비사적〉
유허비각 개기고유문 / 고려 판삼사 치사 손정평공 유허비명 / 유허비 음기 / 비면의 대자 / 비음의 소자 / 첨록
〈타양 입향 시 사적(?陽立享時 事蹟)〉
봉안문(奉安文) / 상향축문 / 타양승원시 사적 / 병산서원 통 타양서원문 / 타양서원 답 병산서원문 / 유허비 음기 / 정평공 유허비각 시십 / 정평공 손선생 실적 후지 / 정평공 유적후 발 / 또(又) / 정평공 손선생 유적 간역시 집사기 / 타양서원 기문 / 정평공 묘비문 / 정평공 한글 묘갈명 / 직산재기
〈정평공 수식 은행나무 시〉
정평공께서 손수 심으신 은행나무 / 정평공께서 손수 심으신 은행나무 / 타양의 은행나무
정평공 유사 번역 후기 / 정평공 유사 번역을 마치고
정평공 유사 원본
저자소개
책속에서
[머리말]
세상 만물에는 그 근원이 있고 우리 인간은 모두가 자신의 근본인 성씨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의 중시조이신 죽석 선조님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단편적인 문헌과 역사적 기술들은 무수히 존재하지만 이를 하나로 묶어 쉽게 선조님을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는 책이 없었습니다.
이에 우리 일직(안동) 손씨 전종원이 뜻을 모아 선조님에 대한 책을 발간하기로 하였습니다. 선조님에 관한 원본판은 융희 2년(1908)의 것으로 하였고 이의 국역판은 2014년 정평공의 20대손이신 정헌(正憲) 종친의 노고에 찬 책자 《정평공 유적》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창려(昌黎) 한씨(韓氏)가 양사업 거원(楊司僕 巨源)을 전송하는 서문에서, 두 소씨(疏氏)의 일을 인용하기를 그 거마(車馬)의 많고 적음과 그림과 시의 유무를 비교하였는데, 이는 두 소씨의 마음을 깊이 알지 못한 것이다. 두 소씨의 말에 “그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만족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하니, 떠나지 않으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태자의 어리석음을 보고 미리 기미를 알고 사퇴하여, 훗날 소부(蕭傅)가 당한 화를 피한 것이다. 저 양거원은 단지 늙어서 물러나 스스로 만년을 즐기려고 한 것일 뿐이니 어찌 두 소씨에 필적할 수 있겠는가?
고려 정평공(孫靖平) 손공(孫公)은 다섯 조정에 종사한 원로로 조정의 계책을 도와 삼중대광(三重大匡) 좌리공신(佐理功臣)의 공훈에 올랐는데, 나이를 이유로 이소(二疏)와 같이 치사(致仕)하고 일직(一直)의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얼마 뒤에 홍건적(紅巾賊)의 난리가 일어나 종묘가 몽진하고 임금이 파천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힘든 호종(扈從)에 지쳐 있었는데, 공은 복건(幅巾)과 지팡이 차림으로 여유롭게 자적하며 세상의 돌풍에서 초연하였다.
우리 조상인 목은공(牧隱公: 이색)이 증여한 시에 이르기를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에는 맑았는데, 공이 떠나자 병란을 겪는구나.〔公在朝廷淸, 公去聞兵腥〕”라고 하였으니, 공의 치사가 어찌 다만 나이가 많은 것 때문이었겠는가. 역사책에 기술된 것에서 바로 두 소씨와 그 행적을 같이하니, 양거원은 진실로 논할 거리가 아니다.
현릉(玄陵: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하셨을 때에는 말 머리에서 맞이하였고, 임금께서 환도(還都)하심에 달려가 난리가 평정됨을 위로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으니, 현릉이 가상히 여겨 직접 그 진영(眞影: 초상화)을 그려 주고 지팡이를 하사하여 귀향을 성대하게 하였다. 이는 또한 두 소씨(疏氏)에게도 없었던 일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일직의 인사들과 그 후손들이 외루(畏壘)에서 제향을 드리고자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나라의 제도에 막혀서, 비석을 세워 유허지를 나타내었다. 이어서 『고려사(高麗史)』와 읍지(邑誌)의 관계 기사를 채집하고 곡강(曲江) 배공(裵公)이 지은 유사(遺事) 및 여러 공들이 지은 비명(碑銘)을 합해서 1책을 만들었다. 대략 공의 시종을 볼 수 있으나 조정에 있을 때의 언론과 이력, 훈업은 자세함을 얻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일을 사양하고 물러난 높은 기풍과 검소한 덕, 피난 때의 절조(節操) 또한 이 책에서 그 대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축년(정조 5, 1781) 중추(中秋: 음력 8월) 하한(下澣: 하순)
통정대부 예조참의 한산(韓山) 이상정(李象靖) 서문을 쓰다
- ‘정평공 유사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