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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91159318139
· 쪽수 : 400쪽
· 출판일 : 2021-12-31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 새로 펴내며
그날의 초록
삭풍
불(1973년 발표 당시 제목 '보리밭')
주례기
운주 동자상
폭염
낙월도
황구의 비명
달무리
배밭굴 청무밭
작가 후기(1975)
해설
황구의 시간, 현실을 껴안은 소설의 윤리 / 양윤의(2007)
저자소개
책속에서
'... 이 용주골에서 살래믄 말야, 첫때루 안면몰수하고 둘때루 예의사절하구, 세때루 악발교육해야 사능 게야. 이 흉터 좀 보라우! 손주 볼 나이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 좀 보라우. 미치가서... 하여튼지 이놈의 용주골, 이거 머이 못돼두 단단히 못된 건데 말이디...'
주인은 땡볕만큼 더운 한숨을 후우ㅡ내뱉고는 다시 야산의 무성한 수풀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주인의 얼굴은 나이보다도 훨씬 겉늙어 있었다.
나는 멍청하게 앉아 이 겉늙어버린 주인이 내뱉은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안면몰수', '예의사절', '악발교육'... 이렇게 삭막한 땅속에서 용케도 숨줄을 잇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주인의 말대로라면 그야말로 살맛 없는 말세의 끝이었다.
나는 당당하게 헛기침을 한두 차례 쏟아내고 일어났다. 새삼스럽게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가 하는 긍지였다. 천성의 탓도 있겠지만, 나는 '평화'나 '행복'이라는 낱말에 대해 별로 크낙한 욕심이 없는 편이었다. 순조로운 일상의 전부는 나에게 있어 곧 평화의 전부였다.
골목 안을 채운 아이들의 함성. 개구쟁이 자식을 부르러 나온 머리가 부숭부숭한 아낙의 화장 않은 얼굴. 정결한 여인의 긴치마. 조강지처의 촌스러운 팔자걸음. 이백십 원이면 살 수 있는 여름 구장(球場)의 열띤 함성들. 닫힌 비원 앞의 어지러운 배드민턴. 합창하는 어린애들의 서툰 불협화음. 그리고 틀림으로써 다시 한 번 기대케 해주는 관상대의 일기예보ㅡ.
이런 것들은 하냥 질기게도 평화를 팔고 있었으며, 나는 시시한 좌변기를 타고 앉아서도 쉽게 이런 평화들을 사고 경험했던 것이었다. _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