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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한국정치사정/정치사 > 제3공화국/제4공화국
· ISBN : 9791160038781
· 쪽수 : 381쪽
· 출판일 : 2025-04-15
책 소개
목차
1장 성장과정과 군인생활
보통학교 시절의 주일학교 1
대구사범학교의 학업 6
박정희의 교사생활 11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 복무 17
8.15해방과 남로당 연루 사건 22
6.25 기간 중의 박정희 29
7. 1950년대의 군 생활 31
2장 5.16과 혁명정부의 기본경제정책
혁명이 불가피했던 정치?경제적 상황 39
5.16혁명과 국가재건최고회의 42
혁명정부 이전의 경제개발계획 48
미국의 혁명정부 승인과 경제개발계획의 요청 55
3장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1962-1966년)
60년대 경상황과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 63
1차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 미국의 견제 72
3. 1962.6.9. 2차 통화개혁 실패 77
4. 1962-1963년, 내적성장전략의 좌절 81
5. 1963.12. 제5대 대통령 취임 87
4장 1차 경제개발 기간 중의 주요사건들
1. 1963.12. 서독 광부?간호사 파견 89
2. 1964.2.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출현 98
3. 1965.6.22. 한일국교정상화 회담 107
4. 1965.10. 베트남 전투부대 파병 114
5. 제1차5개년경제개발의 성과와 평가 118
5장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1967-1971년)
1. 1967-1971년, 10억 달러 수출(한강의 기적) 123
기업을 통한 경제성장 133
기간산업 : 고속도로?화력발전소?포항제철 142
1970년, 새마을운동의 시작 144
산림녹화 149
6장 2차 경제개발 기간 중의 안보문제
1967-68년, 북한의 도발과 닉슨 독트린 155
닉슨독트린과 미 7사단 철수 159
방위산업 추진 161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출현 172
제2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 181
7장 산업화혁명으로서의 시월유신
시월유신의 배경 185
대한민국 내의 공산주의자들 187
3. 1968-1969년, 북한의 계속된 도발 193
4. 1971.4.27. 7대 대통령 선거 196
5. 1972.10. 산업화의 시월유신 207
민청학련과 남민전 사건 220
유신헌법에 대한 재신임 228
8장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1972-1976년)
1. 중화학공업화 선언과 공업구조개편론 233
2. 1973.7.3. 공업화의 첫 성과, 포항제철 239
에너지 위기 243
중동진출과 건설사업 253
플랜트 건설 강국으로 도약 262
3차 경제개발 기간 중의 성과 270
9장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1977-1979년)
1977년, 중화학공업과 수출 100억불 달성 273
자동차 산업 진입 279
자주국방의 실현 284
수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의 건설 292
쌀 자급자족 실현 등 297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과 303
10장 10.26에서 12.12까지
1. 부마사태 305
2. 10.26 사태의 발생 308
3. 10.27-12.12, 합수부의 김재규에 대한 조사 311
4. 12.12사태의 발발 315
수경사 장태완과 육본 차장 윤성민의 혼란 322
장태완과 정병주의 체포 326
최 대통령의 재가 : 노재현 국방장관의 행적 336
부 록
박정희의 생애 요약 343
박정희 대통령 연표 369
저자소개
책속에서
대한민국은 이승만과 박정희로 인해 탄생하였다. 한 개인의 역할이 그렇게 컸던 것이다. 세계 어느 위인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치 위대하였다. 이 둘의 특성은 애국심이었는데, 그 애국심이 이들의 영혼을 삼켜 버렸다. 이승만은 기독교 정신에 의해 빗어진 사 람이고, 박정희는 아마 그의 어린 시절의 교회생활과 군인정신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이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두 청렴결백 하고 검소했다는 것이다. 사욕을 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우리나라에 기독교정신에 따라 공산주의와 싸워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대한민국을 건설하였고, 박정희는 이 기 반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 위에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룩하였다.
박정희는 그의 애국심을 가난과의 싸움에 바쳤다. 그는 서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방문한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울며, "저도 열심히 할 테니 함께 열심히 하여 가난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맙시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그는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 를 하라고 말하면서, "당신이나 나나 나라라는 제단에 목숨을 바쳤쟎소?"라고 말하였다. 그는 대통령 임기 내내 매월 개최되는 <수출 진흥확대회의>에 참여하여 기업인들과 함께 몸을 부대끼며 수출진흥에 온 몸을 바쳤다. 박정희의 애국심이 이때 기업인들과 공무원 들에게도 흘러내려갔다. 그는 수출이 국민들의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수출진흥을 위해서 그의 몸을 아낌없이 불살랐다.
박대통령은 산업현장의 선두에서 직접 진두지휘를 하다보니 경공업에서 그 한계를 인식하였다. 중공업으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 다. 여기에 또한 안보의 문제까지 겹쳤다. 이때 오원철이라는 경제책사가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결합한 <공업구조개편론>을 제시 하였다.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략이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 중임제였다.
박대통령은 여기에서도 자신을 투신하였다. 산업화를 위해 삼선개헌과 시월유신을 단행한 것이다. 시월유신은 1972.10.17. 국민투 표를 통해 실행되었고, 정적들의 극심한 반발로 인해 또 다시 1975.2.12. 국민투표를 통해 재신임을 받았다. 이 시월유신의 결과 3차?4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진행된 것이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이때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오늘날 대한민 국의 30대 기업이 모두 출현하였다. 시월유신으로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가 되었으며, 5위권의 방위산업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시 월유신은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이다. 시월유신 없는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월유신 독재가 정치적 문제를 야기했다. 박정희는 분명히 유신헌법에 대해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그의 정적들은 시 월유신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는 10.26사태로 김재규에 의해 시해를 당했는데, 유신 독재의 문제가 있었다. 박정희 최대 정 적은 김대중이었는데, 그는 청년 때 남로당(공산당)으로 편입된 신민당 목포 청년부위원장이었다. 그는 시월유신이 선포되자 해외에 서 한민통(조총련 산하)의 대표가 되어 유신반대 운동을 하였다. 김대중 뒤에는 항상 공산주의가 따라 다녔으며, 많은 지식인들과 대 학생들이 민중민주주의(사회주의)에 현혹되어 넘어갔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광주 5.18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