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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91161290812
· 쪽수 : 460쪽
· 출판일 : 2018-10-31
책 소개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서론
제1장 그리스-로마 정치 세계에서의 에클레시아
1.1 고전 시대 아테네의 에클레시아
1.1.1 연구의 대상과 기본 개념
1.1.2 에클레시아의 의제와 권한
1.1.3 에클레시아의 유형과 회집 장소
1.1.4 시민의 정치 참여로서의 폴리스
1.1.5 발언의 자유: 이디오테스의 문제
1.1.6 누가 시민이 되어야 하는가?: 바나우소이의 문제
1.1.7 폴리스적 동물의 유산
1.2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의 에클레시아
1.2.1 에클레시아는 불레의 결정을 추인하는 고무도장이었나?
1.2.2 로마 제국이 그리스의 데모스를 이해하는 방식
1.2.3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인 방식
1.2.4 문화적 배경: 명예의 제국
1.2.5 에클레시아가 자발적 조합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는가?
제2장 70인역과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의 에클레시아
2.1 서론
2.2 히브리어 구약성서와 70인역에 나타난 에클레시아
2.3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 이스라엘의 데모스
2.3.1 논의의 상황
2.3.2 “조상들의 정치체제”와 신정정치
2.3.3 마카베오서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데모스
2.3.4 로마 치하에서의 유대인 데모스
2.4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기억 속에서의 에클레시아
2.5 예루살렘의 중심성
2.6 요약
제3장 바울의 에클레시아 사용
3.1 논의의 상황
3.2 바울이 에클레시아를 사용하는 다섯 가지 맥락
3.2.1 문안 인사
3.2.2 지역교회들 간의 관계
3.2.3 가정 모임과 대별되는 한 지역 그리스도인 전체 집회
3.2.4 신적 기관에 대한 인간의 침해: 하나님의 교회
3.2.5 교회 직분의 명칭으로 쓰인 경우
3.2.6 결론
3.3 가정교회의 문제
3.4 예루살렘과 보편교회의 문제
3.4.1 사도행전의 에클레시아에서 에클레시아들로의 발전
3.4.2 로마서 본론에 에클레시아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
제4장 고린도 교회의 갈등에 대한 바울의 처방과 에클레시아
4.1 집회의 물리적 환경
4.2 갈등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중요한 질문
4.2.1 어떤 종류의 식사인사? 누가 식사비를 지불했는가?
4.2.2 주의 만찬에서 해당 주택 소유자의 지위와 역할
4.2.3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4.2.4 배고파야 했던 사람들?: 갈등의 사회적 양상
4.3 고린도 교회에서 가정교회의 문제
4.4 성찬의 무질서에 대한 바울의 처방
4.5 남는 문제: 가정 모임의 지위
제5장 바울 교회들의 지역적 다양성
5.1 바울 교회들의 사회사와 고린도 교회
5.2 바울 교회들의 사회적 계층
5.2.1 경제적 등급 4의 중요성
5.2.2 전체 집회의 공간 제공자
5.2.3 공동체의 리더십과 가정교회
5.2.4 사도행전에 있는 자료 사용의 문제
5.3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회적 구조
5.3.1 재정 후원자 없는 공동체
5.3.2 공동체의 모임 장소 문제
5.3.3 공동체의 조직
5.4 빌립보 교회의 사회적 구성
5.4.1 공동체의 조직
5.4.2 가난했지만 모금에 성공했던 빌립보 교인들
5.5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은 자발적 조합이었나?
5.6 후대의 발전: 공동 자금이 있는 교회와 없는 교회
결론/ 참고문헌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에클레시아가 정말로 절대주권을 가지고 있었는가와 관련한 세부적 정치제도에 대한 논의와는 별도로, 폴리스의 주권이 에클레시아에 있다는 사상이 민주정치 시대 아테네의 지배적 가치였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런 민주주의 이념의 영향력은 정치 형태로서의 직접민주주의의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잔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싱클레어(Sinclair)는 절대주권을 가진 에클레시아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 전제라고 말한다. 이 주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 그리스어권의 정치 지형을 논하면서 다시 다룰 것이다. 에클레시아의 절대주권에 의심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현대의 의회와 비슷한 불레(평의회)가 실제적인 권력을 가진 기관이었다고 주장한다. 아테네에서 불레는 500인 평의회로, 에클레시아에서 심의할 의안을 발의하는 기구였다. 그러나 의안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여전히 에클레시아가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500인 평의회는 남자 성인 500명을 추첨에 의해서 결정하였고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였기 때문에 일부 귀족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평민에 의해 운영되는 기구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평의회 구성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만 나타난 독특한 제도였다. 이는 지역의 유지들로 구성되어 있고 임기가 종신제였던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고 라틴화된 지역들의 평의회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_제1장 그리스-로마 정치 세계에서의 에클레시아
스스로를 언약 백성으로 규정하는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서 에클레시아는 국가의 방향을 논의하고 선택하는 기능보다는, 하나님과의 언약, 또는 언약을 잘 지키기 위한 어떤 결정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온 백성이 만장일치로 승인하는 기능을 했다. 따라서 70인역의 에클레시아에서는 민의를 모으는 구체적인 토론과 결정의 절차보다는, 어떤 결정의 결과가 더 중요시되고 있다.…에클레시아가 전체 백성을 대표한다는 사실은 실질적으로 예루살렘의 대표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예루살렘의 중심 지위는 구약 신학의 중심과 맞닿아 있으며,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메트로폴리스의 역할로 이해될 수 있었다.
_제2장 70인역과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의 에클레시아
에클레시아는 바울 이전의 예수 운동에 도입된 용어이지만,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대표적인 명칭도 아니었고, 빈번히 사용되던 용어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제한적인 문맥에서, 예를 들면 외적 박해와 내적인 침해에도 불구하고 침해당할 수 없는 신적 기관의 본질을 강조하는 문맥 등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 용어를 그리스도 신앙 운동의 전면에 내세운 것은 바울이었다. 바울의 가장 큰 공헌은 이 용어를 이방인으로 구성된 지역 회중들, 곧 한 폴리스의 하나님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그룹에 적용했다는 점이다. 역사 속의 많은 공헌이 그러하듯이 이는 기존의 관례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구약에서 카할과 에클레시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켜야 했으며, 더구나 이 단어 자체가 이스라엘 순혈주의의 보루로 여겨져왔기 때문에, 그 영향의 자장 속에 있던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가 바울의 에클레시아 사용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1세기 말 이후로 현재까지 그리스도인들 모임의 대표 호칭이 된 점을 생각하면 신약성서의 문서들이, 바울이나 그의 영향 하에 있던 문서들을 제외하고는 이 단어에 이상하리마치 냉담하다는 데서 우리는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결국에는 그리스도교 주류로 등극하게 될 교회론(ecclesiology)의 기본 틀은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정치적 결사체에 이방인들도 함께 시민으로 참가하게 되었다는 비전이었다.
_제3장 바울의 에클레시아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