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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63024644
· 쪽수 : 480쪽
· 출판일 : 2021-03-12
책 소개
목차
0. 혼자만의 1주년
1. 목표는 덜 사랑하기
2.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3. 지금이라도 되돌려
4. 사랑은 무겁다
5.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면
6. 과속은 금물
7. 내가 뭐라고
8. 우연이, 운명처럼
에필로그
외전 1. 비서의 일
외전 2. 두 사람을 위한 선물
외전 3. 예비 부모의 사정
저자소개
책속에서
“앗, 뜨거워!”
뜨거운 냄비 손잡이를 그대로 잡을 뻔했던 유리는 손을 후후 불었다. 실리콘 손잡이를 끼고 다시 냄비를 잡고 싱크대에 돼지고기를 끓인 물을 따라 버렸다. 이제 익힌 돼지고기를 차갑게 식히고 갈비찜 양념에 네 시간 동안 재울 것이다.
돼지갈비찜. 요리라곤 채소를 볶고 소스를 부어 마무리하는 파스타나 고기를 굽는 것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유리로선 아주 큰 도전이었다. 함께 넣는 감자와 당근 따위도 조리 중에 뭉그러지지 않게 하려면 각 없이 둥글게 깎아야 한다는 말에 얼마나 놀랐던가.
게다가 갈비찜 외에 함께 준비한 밑반찬들 역시 만들기 까다로웠다. 다듬고, 데치고, 버무리고. 한 번에 만들어지는 음식이 없었다. 한식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줄 몰랐다.
그렇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기에.
유리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2시에 가까워져 가는 시간. 강준도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것이다. 커피를 마셨어도 남는 시간이다.
익숙한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정직한 기본음이 울리고 전화가 연결되었다.
-무슨 일이야?
첫마디부터 용건을 묻다니. 효율성을 추구하는 강준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유리지만 그래도 의기소침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점심 드셨어요?”
-먹었지, 그럼.
‘나도 먹었냐고 물어봐 주지…….’
잘 쓰지 않는 연차까지 쓰고 새벽부터 요리에 매달리고 있었더니 음식 냄새에 질려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이 끼니 좀 거른다 해서 큰일이 나진 않지만, 그래도 약간 섭섭하긴 했다.
그렇지만, 한두 번 이런 것도 아니니 넘어가자.
유리는 서운함을 삼키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몇 시에 오시나 해서요.”
-……오늘?
그런데 강준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의아한 목소리. 그리고 조금 뒤 종이가 팔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다시 물었다.
-오늘 우리, 만나기로 했던가?
“…….”
턱. 말문이 막혔다. 평소 무심한 성격이지만, 설마 오늘 같은 날도 기억하지 못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허무함에 온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유리는 자신을 추슬렀다.
‘모를 수도 있어. 바쁜 사람이잖아. 요즘 특히 바쁠 때고…… 팀장님 말대로 우리가 오늘 보자고 약속 잡은 건 아니었으니까. 정확한 거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왜 대답이 없지? 내가 시간 낭비하는 거 싫어하는 줄 알 텐데.
조금 짜증이 어린 그의 목소리에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해 버렸다. 감정적으로 대꾸했다. 투정 부리는 어린애처럼.
“오늘…… 1주년이잖아요, 우리.”
그가 제일 싫어하는 짓인 줄 알면서도.
-…….
“…….”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유리의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니,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가 대체 무슨 대답을 할까 싶어서.
화를 낼까? 아니면 미안하다고 할까. 미안하다는 말은 차마 상상하기 어려워서, 그냥 화만 내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뒤,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1주년? 그런 게 중요한가?
차가운 목소리가 마치 바늘처럼 기대감에 부풀었던 마음을 찌른다. 펑! 풍선이 터져 나가는 것 같다.
눈물이 차올랐다. 유리는 이게 전화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얼굴을 보며 대화했다면 눈물을 참았을 자신이 없었다.
식탁과 싱크대에 각종 재료와 어설프게 완성된 요리들이 가득 널려 있었다. 유리는 처음 이 이벤트 아닌 이벤트를 생각해 냈던 때를 떠올렸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본가에서 독립해서 사는 강준은 아마도 집밥을 먹지 못한 지 오래일 것이다. 얼굴은 스테이크만 썰 것처럼 생겨서, 은근히 갈비탕이나 설렁탕, 속을 뜨끈하게 덥혀 주는 한식들을 좋아한다는 걸 유리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직접 만든 요리를 해 주고 싶었다. 별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 요리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속상함을 참고 답했다. 그가 그녀의 요리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중요해요. 저한테는요.”
그러나 강준은 유리의 기대를 깨부쉈다. 무참하게.
-하……. 알겠어. 레스토랑을 예약하지. 바쁘니까 끊어.
뚝-.
“아…….”
끊어진 전화를 붙잡은 채 유리는 작은 신음을 흘렸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이건 악몽일까? 꿈이라면 깨고 싶어.’
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시야를 흐리게 만들던 눈물이 후드득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는 것뿐.
“흑, 흑……. 말이라도 들어 주지…….”
음식 냄새가 가시지 않은 손으로, 유리는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눈앞에 즐비한 요리 재료들을 잊고 싶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