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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사상사 권1 상

양한사상사 권1 상

(주.진.한 정치사회구조 연구)

서복관 (지은이), 김선민, 문정희 (옮긴이)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3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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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사상사 권1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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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양한사상사 권1 상 (주.진.한 정치사회구조 연구)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중국철학
· ISBN : 9791166840890
· 쪽수 : 424쪽
· 출판일 : 2022-07-25

책 소개

서복관의 나이 63세에 발분하여 77세까지 약 15년에 걸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으로서 학문의 내공이 쌓일 만큼 쌓인 만년의 나이에 무르익은 사상의 정수를 쏟아부어 빚어낸 일생일대의 역작이다.

목차

역자 서문
일러두기

서장
1. 삼판개명 자서(三版改名自序)
2. 중국 은주(殷周)의 사회 성격 문제에 관한 보충의견―대만판 서문을 대신하여
3. 자서(自序)

제1장 서주(西周) 정치 사회의 구조 성격 문제
1. 서주 노예사회론자에 대한 검토
2. 주 왕실의 종법제도
3. 주 왕실의 봉건제도와 그 기본정신
4. ‘국인(國人)’의 성격, 지위 문제
5. 토지제도와 농민
6. 농민의 지위와 생활 형편
원주

제2장 봉건 정치사회의 붕괴와 전형적 전제정치의 성립
1. 봉건 정치질서의 붕괴
(1) 주 왕실의 봉건적 지도력의 상실과 그 원인
(2) 봉건정치의 전면적 붕괴
2. 부세(賦稅) 중압에 의한 봉건사회의 해체
3. 봉건사회 해체 속에서의 국인(國人) 계층의 발전과 전환
(1) ‘상(商)’의 의미와 유래
(2) 춘추 말기의 상업 발전
(3) ‘사(士)’의 의미와 유래
(4) 춘추 말기 사(士)의 발전 중의 전환
(5) 국인(國人) 계층의 발전 전환이 정권에 미친 영향
4. 봉건 도덕의 전승 문제와 종법의 정치에서 사회로의 이동
(1) 공자가 전승한 봉건 도덕의 가치 문제
(2) 예(禮)의 전승 중의 전환
(3) 종법의 정치에서 사회로의 이동
5. 개방의 과도시대
(1) 국가 성격의 변화
(2) 상공업의 발전
(3) 사(士) 집단의 확대
(4) 정치사상의 대분야
(5) 관념상 정치사회의 개방과 폐쇄
6. 상앙 변법과 진의 통일 및 전형적 전제정치 출현과의 관계
(1) 유동사회에서 맹자가 “보민위왕(保民爲王, 백성을 보호해야 왕자가 될 수 있다)”을 말한 근거
(2) 유동사회의 배경하에서 상앙(商鞅) 변법의 부정적 의미
(3) 상앙 변법의 긍정적 의미
(4) 여불위(呂不韋)의 에피소드
7. 전형적 전제정체(專制政體)의 성립
(1) 중국과 서양의 전제의 차이
(2) 중앙 전제
(3) 일인 전제
8. 일인 전제의 다섯 가지 특성
9. 전제정치의 사회적 기초 문제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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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서복관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3년 1월 31일 중국 호북성 희수현(浠水縣) 서가요(徐家坳) 마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기초교육을 받았고, 무창 제일고등사범학교(1918-1923)와 국학관(1923-1926)에서 엄격한 국학 훈련을 받았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경제학을 공부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대량 흡수하였으며, 경제적 지원 부족으로 1929년 일본 사관학교 중국팀 23기에 입학하였다. 1931년 9·18사건으로 귀국하여 군직을 맡았다. 1937년 낭자관(娘子關) 전투와 1938년 무한(武漢) 보위전 실전에 참여하였다. 1943년 5월에서 10월 사이 군령부 소장(少將) 연락참모로 연안(延安)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모택동(毛澤東), 주은래(周恩來)와 여러 차례 개인적인 접촉을 가졌다. 중경(重慶)으로 돌아간 후, 「중공 최신 동태」보고서로 장개석(蔣介石)에게 알려지면서 그의 막료로 발탁되어 점차 최고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8년 3월 소작농이 소작료를 토지 매입비로 하여 토지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토지개혁 방안을 제출하였고 이 방안은 1953년 대만에서 시행되었다. 1951년 이념이 맞지 않아 국민당을 탈당하고 대학에 부임하면서 학문을 시작하였다. 그는 100여 년 동안 중국에서 유일하게 군사·정치의 실무 경험을 갖춘 유교학자였다. 서복관은 공자와 맹자 및 『논어』를 종지로 삼고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도는 반드시 보편적인 실천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20세기 이래 중국의 학자들이 다투어 서양을 모방하고 사변(思辨)적 방법으로 중국 전통사상을 ‘철학화(哲學化)’하는 데만 전념해 온 학문적 성과는 ‘관념의 유희’일 뿐 공자·맹자의 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았다. 서복관은 이렇게 말한다. “공자의 가르침에 의해 개척된 세계는 현실 생활 속의 ‘정상인(正常人)’의 세계이다. 사람과 사람이 들어가야 하고, 들어갈 수 있는 평안한 세계이다. 사람이 플라톤의 이상형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헤겔의 절대정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서복관의 연구는 사상사를 중심으로 예술과 문학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는 선진(先秦) 사상이 전제(專制) 통치를 거치면서 왜곡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중국 문화가 원래 가지고 있는 민주 정신을 다시 활짝 터놓아 흐르게 하고 싶다. 이것은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는[爲往聖繼絕學]’ 일이다. 그것은 일부 정신으로 하여금 민주 정치를 지지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여는[爲萬世開太平]’ 일이다[역주: “爲往聖繼絕學, 爲萬世開太平”은 장재(張載)의 『근사록(近思錄)』에 나오는 말이다]. 정치가 민주적이지 않으면 태평도 있을 수 없다.” 저서로는 『중국사상사논집』(1959), 『중국인성론사―선진편』(1963), 『중국예술정신』(1966), 『중국문학논집』(1966), 『공손룡자강소(公孫龍子講疏)』(1966), 『석도지일연구(石濤之一研究)』(1969), 『양한사상사』 권1(1972), 『양한사상사』 권2(1976), 『황대치양산수장권적진위문제(黃大癡兩山水長卷的眞僞問題)』(1977), 『양한사상사』 권3(1979), 『유가정치사상여민주자유인권(儒家政治思想與民主自由人權)』(문집, 1979), 『주관성립지시대급기사상성격(周官成立之時代及其思想性格)』(1980), 『중국문학논집속편』(1981), 『중국사상사논집속편』(1982), 『중국경학사적기초』(1982) 등이 있다. 1982년 4월 1일 별세하였다. 중국의 고난시대를 겪으며 서복관은 강한 ‘서민적 줄거리’[곽제용(郭齊勇) 교수의 말]를 가진 300여만 자의 시사평론을 썼으며, 1949년부터 1982년까지 대만과 홍콩에서 가장 권위 있는 평론가였다. [출처: 서복관 선생 아들 서무군(徐武軍)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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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민 (옮긴이)    정보 더보기
연세대학교 사학과, 동 대학원 석·박사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역서로 《양한사상사(兩漢思想史)》 1(2022), 《황제사경 역주(黃帝四經譯註)》(2011), 《古代中國》(1995) 등이 있고, 논문으로 〈魏晉시기 관리의 三年喪 “解官” 법제화 과정〉(2022), 〈위진남북조 상례(喪禮)에서의 윤월(閏月)의 문제와 법제화 과정〉(2013), 〈兩漢 이후 皇帝短喪制의 확립과 官人三年服喪의 入律〉(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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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역주)    정보 더보기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 취득.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연구교수. 역서로 『역주 중국 정사 외국전 1: 사기 외국전 역주』(2009), 『역주 중국 정사 외국전 2: 한서 외국전 역주 상』(2009), 『역주 중국 정사 외국전 6: 남제서·양서·남사 외국전 역주』(2010), 『역주 중국 정사 외국전 7: 위서 외국전 역주』(2010), 『天空의 玉座―중국 고대제국의 조정과 의례』(2002)(이상 공역), 논문으로 「고대 중국의 출행의식과 여행금기」(2008), 「일서(日書)를 통해 본 고대 중국의 질병관념과 제사습속」(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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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요컨대 나는 주대에 노예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 초 이후 3천여 년 동안 중국사회에 노예는 모두 있었다. 또한 농노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국어』 「진어(晉語)」에서 곽언(郭偃)의 말 가운데 “예농(隸農)과 다름이 없어 비록 비옥한 경지를 얻어서 부지런히 가꾼다 해도 자신이 먹지 못하고 남 좋은 일만 시킬 것이다”라는구절이 있다. 이것은 예농이 사전(私田)을 소유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지만 주대 농부의 절대다수는 예농이 아니었는데 그들은 사전을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주대에 노예가 있었다고는 해도 전반적 상황으로 보아 노예는 주대 정권의 기초도 아니었고 당시 사회생산의 주요 성분도 아니었다. 주대를 노예사회로 일컫는 것은 역사사실에 위배되는 일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종법의 친친(親親)은 주나라 봉건정치의 골수(骨髓)이다. 효제(孝悌)·예양(禮讓)·인애(仁愛)를 기저로 하는 도덕적 요구는 모두 여기서 발전한 것이다. 주나라 정치는 후세와 비교하여 특히 인도적 의미가 풍부한데 이 또한 “친친(親親)”의 뿌리에서 발전된 것이다. 고고학 발굴로 드러난 은나라 귀족의 무덤에는 항상 많은 수의 순장자가 있었다. 그러나 근년 대량 발굴된 주대의 무덤에는 거의 이러한 현상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은·주 교체기에 정신상의 대전환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골수가 고갈되면 봉건정신은 파멸되고 만다.


그러나 이 봉건제도가 역사의 특정 단계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고, 그 붕괴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두 가지 동력 아래 장기간의 변화를 겪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봉건제도의 점차적인 붕괴 과정은 바로 전제정치의 점차적인 형성 과정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전형적 전제정치”는 진대(秦代)의 단기로 끝난 전제정치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진대의 전제정치는 한편으로는 물론 봉건제도의 붕괴 과정에서 형성된 많은 조건들에 의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법가들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정치 형태와 진정(秦政, 시황제)·이사(李斯) 등이 달성하려는 정치적 목적에 근거하여 “정치적 창의”로써 수립한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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