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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사상사 권1 하

양한사상사 권1 하

(주.진.한 정치사회구조 연구)

서복관 (지은이), 김선민, 문정희 (옮긴이)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3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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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사상사 권1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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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양한사상사 권1 하 (주.진.한 정치사회구조 연구)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중국철학
· ISBN : 9791166840913
· 쪽수 : 444쪽
· 출판일 : 2024-05-30

책 소개

『양한사상사』는 서복관의 나이 63세에 발분하여 77세까지 약 15년에 걸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으로서 학문의 내공이 쌓일 만큼 쌓인 만년의 나이에 무르익은 사상의 정수를 쏟아부어 빚어낸 일생일대의 역작이다.

목차

양한사상사·권1 하

● 역자서문/ 5
● 일러두기/ 25

제5장 전한 지식인이 전제정치로부터 받는 압박감

● 원주/ 58

제6장 중국 성씨의 변천과 사회형식의 형성

1. 머리말 / 63
2. 씨(氏)의 유래 탐구 / 66
3. 성(姓)의 유래 탐구 / 77
4. 주 초 성씨(姓氏) 내용의 변화 / 86
5. 춘추 시대 씨(氏)의 변화 / 103
6. 고대 평민의 성씨 문제 / 109
7. 평민 사회로의 성씨의 보급 / 116
8. 성씨 보급 후 사회구조의 변화 / 124
9. 효(孝)를 중심으로 한 윤리관념의 보급과 종족의 기능 / 138
10. 전제정치의 종족세력에 대한 박해 / 147
11. 성씨가 지닌 이민족 동화(同化) 역량 / 159
12. 결어 / 168

● 원주/ 173

부 록
【부록 1】 서주 초 몇 가지 사실(史實)에 관한 문제 / 179
【부록 2】 ‘판본(版本)’의 ‘본(本)’ 해석과 사례 거본(士禮居本) [국어(國語)]의 해명 / 289
【부록 3】 주공단(周公旦)이 즉위, 칭왕(稱王)을 했는지의 문제에 대한 진몽가(陳夢家), 굴만리(屈萬里) 두 선생과의 토론 / 313
【부록 4】 주공(周公)의 즉위, 칭왕(稱王) 문제에 관한 굴만리의 답글에 재답변하다 / 391

● 찾아보기/ 437

저자소개

서복관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3년 1월 31일 중국 호북성 희수현(浠水縣) 서가요(徐家坳) 마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기초교육을 받았고, 무창 제일고등사범학교(1918-1923)와 국학관(1923-1926)에서 엄격한 국학 훈련을 받았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경제학을 공부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대량 흡수하였으며, 경제적 지원 부족으로 1929년 일본 사관학교 중국팀 23기에 입학하였다. 1931년 9·18사건으로 귀국하여 군직을 맡았다. 1937년 낭자관(娘子關) 전투와 1938년 무한(武漢) 보위전 실전에 참여하였다. 1943년 5월에서 10월 사이 군령부 소장(少將) 연락참모로 연안(延安)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모택동(毛澤東), 주은래(周恩來)와 여러 차례 개인적인 접촉을 가졌다. 중경(重慶)으로 돌아간 후, 「중공 최신 동태」보고서로 장개석(蔣介石)에게 알려지면서 그의 막료로 발탁되어 점차 최고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8년 3월 소작농이 소작료를 토지 매입비로 하여 토지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토지개혁 방안을 제출하였고 이 방안은 1953년 대만에서 시행되었다. 1951년 이념이 맞지 않아 국민당을 탈당하고 대학에 부임하면서 학문을 시작하였다. 그는 100여 년 동안 중국에서 유일하게 군사·정치의 실무 경험을 갖춘 유교학자였다. 서복관은 공자와 맹자 및 『논어』를 종지로 삼고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도는 반드시 보편적인 실천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20세기 이래 중국의 학자들이 다투어 서양을 모방하고 사변(思辨)적 방법으로 중국 전통사상을 ‘철학화(哲學化)’하는 데만 전념해 온 학문적 성과는 ‘관념의 유희’일 뿐 공자·맹자의 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았다. 서복관은 이렇게 말한다. “공자의 가르침에 의해 개척된 세계는 현실 생활 속의 ‘정상인(正常人)’의 세계이다. 사람과 사람이 들어가야 하고, 들어갈 수 있는 평안한 세계이다. 사람이 플라톤의 이상형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헤겔의 절대정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서복관의 연구는 사상사를 중심으로 예술과 문학도 함께 다루고 있다. 그는 선진(先秦) 사상이 전제(專制) 통치를 거치면서 왜곡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중국 문화가 원래 가지고 있는 민주 정신을 다시 활짝 터놓아 흐르게 하고 싶다. 이것은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는[爲往聖繼絕學]’ 일이다. 그것은 일부 정신으로 하여금 민주 정치를 지지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여는[爲萬世開太平]’ 일이다[역주: “爲往聖繼絕學, 爲萬世開太平”은 장재(張載)의 『근사록(近思錄)』에 나오는 말이다]. 정치가 민주적이지 않으면 태평도 있을 수 없다.” 저서로는 『중국사상사논집』(1959), 『중국인성론사―선진편』(1963), 『중국예술정신』(1966), 『중국문학논집』(1966), 『공손룡자강소(公孫龍子講疏)』(1966), 『석도지일연구(石濤之一研究)』(1969), 『양한사상사』 권1(1972), 『양한사상사』 권2(1976), 『황대치양산수장권적진위문제(黃大癡兩山水長卷的眞僞問題)』(1977), 『양한사상사』 권3(1979), 『유가정치사상여민주자유인권(儒家政治思想與民主自由人權)』(문집, 1979), 『주관성립지시대급기사상성격(周官成立之時代及其思想性格)』(1980), 『중국문학논집속편』(1981), 『중국사상사논집속편』(1982), 『중국경학사적기초』(1982) 등이 있다. 1982년 4월 1일 별세하였다. 중국의 고난시대를 겪으며 서복관은 강한 ‘서민적 줄거리’[곽제용(郭齊勇) 교수의 말]를 가진 300여만 자의 시사평론을 썼으며, 1949년부터 1982년까지 대만과 홍콩에서 가장 권위 있는 평론가였다. [출처: 서복관 선생 아들 서무군(徐武軍)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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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민 (옮긴이)    정보 더보기
연세대학교 사학과, 동 대학원 석·박사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역서로 《양한사상사(兩漢思想史)》 1(2022), 《황제사경 역주(黃帝四經譯註)》(2011), 《古代中國》(1995) 등이 있고, 논문으로 〈魏晉시기 관리의 三年喪 “解官” 법제화 과정〉(2022), 〈위진남북조 상례(喪禮)에서의 윤월(閏月)의 문제와 법제화 과정〉(2013), 〈兩漢 이후 皇帝短喪制의 확립과 官人三年服喪의 入律〉(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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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역주)    정보 더보기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 취득.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연구교수. 역서로 『역주 중국 정사 외국전 1: 사기 외국전 역주』(2009), 『역주 중국 정사 외국전 2: 한서 외국전 역주 상』(2009), 『역주 중국 정사 외국전 6: 남제서·양서·남사 외국전 역주』(2010), 『역주 중국 정사 외국전 7: 위서 외국전 역주』(2010), 『天空의 玉座―중국 고대제국의 조정과 의례』(2002)(이상 공역), 논문으로 「고대 중국의 출행의식과 여행금기」(2008), 「일서(日書)를 통해 본 고대 중국의 질병관념과 제사습속」(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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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성씨의 관계는, 주나라 초에 건립된 종법제도에 성씨가 포함되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 종법제도는 혈통관계를 바탕으로 주 왕실의 기본 역량을 당시의 요충지에 분봉하고, 혈통의 “친친(親親)” 의리를 바탕으로 분봉한 제후들을 왕실 주위에 결집시켜 중앙의 정치적 통제력을 강화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종법상의 친족제도를 정치상의 통치제도로 바꾸는 것이다. 종법중의 대종(大宗)은 정치 중의 각국의 인군(人君)이며, 주나라 왕은 각국의 대종이 비롯되어 나오는 근본[所自出]이 된다. 지금 편의상 주나라 왕을 “통종(統宗)”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왕실이 소재한 풍(豊)·호(鎬)를 “종주(宗周)”라 칭하는 것이다. 이때의 희성(姬姓)의 ‘희’는 이전의 성(姓)과 씨(氏)의 이중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 혈통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권력의 부호가 된다.


여기서 다시 고대 평민들의 성씨 문제를 특별히 제기하고자 한다. 여기서의 평민이라 함은 상층의 귀족에 대한 상대적인 말이다. 춘추 시대에서 주 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의 인민들은 일부 노예를 제외하고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판단된다. 하나는 도읍 안과 그 부근에 거주하는 “국인(國人)”이다. 또 하나는 사방의 근교[四郊] 바깥에 있는 농경을 업으로 하는 “서인(庶人)” 또는 “야인(野人)”이다. 서인은 봉건통치집단과 혈통관계가 없다는 점, 즉 통치집단의 대종(大宗)·소종(小宗)의 계열 바깥에 있으며 성(姓)도 씨(氏)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국인”은 처음에는 종법의 범위 안에 있었으나, 성(姓)은 왕과 제후가 대표하고 씨는 귀족이 대표하였으며, 오직 왕이나 제후가 종족을 회합하여 연회를 베풀[合宗收族] 때만 그들을 서성(庶姓)이나 자성(子姓)으로 인정하였다.


송나라 정초(鄭樵)의 ??통지(通志)?? 권25 ?씨족략서(氏族略序)?에서는 “삼대 이전에는 성과 씨를 구별하였다. 남자는 씨(氏)를 칭했고 부인(婦人)은 성(姓)을 칭하였다. 씨는 귀천을 구별하는 기준으로서 신분이 높은 자[貴]는 씨가 있었고, 신분이 낮은 자[賤]는 이름은 있으나 씨는 없었다. 지금 남방의 여러 만족(蠻族)들은 여전히 이러한 관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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