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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중국철학
· ISBN : 9791168150522
· 쪽수 : 368쪽
· 출판일 : 2023-07-21
책 소개
목차
서문 4
손무(孫武)에 대하여 16
『손자병법』의 영향과 위상 18
제1편 시계(始計) 21
제2편 작전(作戰) 47
제3편 모공(謀攻) 63
제4편 군형(軍形) 83
제5편 병세(兵勢) 101
제6편 허실(虛實) 119
제7편 군쟁(軍爭) 151
제8편 구변(九變) 177
제9편 행군(行軍) 195
제10편 지형(地形) 229
제11편 구지(九地) 255
제12편 화공(火攻) 305
제13편 용간(用間) 323
참고자료 345
감수 후기 364
리뷰
책속에서
손무(孫武)에 대하여
저자 손무(孫武)는 춘추시대(B.C. 770~404) 말기, 제(齊)나라 낙안 출신으로, 생몰연대에 관한 뚜렷한 기록이 없으며, 대개 공자(孔子)와 동시대(B.C. 551~479)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주요 활동기는 오(吳)나라 군주 합려(闔廬, B.C. 514~496 재위)와 부차(夫差, B.C. 495~473 재위)의 재위 기간에 걸쳐 있다. 자(字)는 장경(長卿)이며, 통상 손자(孫子) 또는 손무자(孫武子)라 일컫는다.
손무의 조상은 진(陳)나라 왕족으로, B.C. 627년에 제나라로 망명하여 전씨(田氏)로 성을 바꾸고 약 1백 년간 번성하다가, 조부인 전서(田書) 대에 전공을 세우고 손씨의 성을 하사받았다. 손무가 활동하던 제나라는 당시 정치가 극도로 문란하여 그의 가문은 B.C. 547년에 양자강 이남의 오나라로 망명하게 되었다.
당시 오나라는 서쪽의 강대국 초(楚)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양국 간에는 끊임없는 국경 충돌이 일어났다. 손무가 망명하던 무렵의 오나라는 왕 요(僚)가 암살당하고 그 후임으로 합려가 즉위하는데, 합려는 초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적임자를 찾던 중 오자서의 추천으로 손무를 만나게 된다.
손무는 오나라 전군 지휘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아 군사력을 건설하고 엄격한 교육훈련을 통해 강병을 육성했다. 전쟁준비가 완료되자, B.C. 506년에 강대국 초나라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로써 오나라는 약소국에서 춘추오패(5대 패권국)가 되었다. 손무는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를 보좌하여 B.C. 492년에 월나라를 굴복시키는 등 오나라의 국력을 절정에 올려놓고 관직에서 은퇴하여 홀연히 떠났다.
『손자병법』에는 춘추시대 오나라의 손무가 저술한 『손자병법』과 전국시대 제나라의 손빈이 저술한 『손자병법』이 있다. 통상의 『손자병법』은 손무가 저술한 『손자병법』을 말한다. 손빈(孫臏)은 손무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병법의 구성도 기존의 『손자병법』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 손빈의 『손자병법』을 『손빈병법』이라 칭하고 있다.
『손자병법』은 그가 등용되기 전에는 13편이었다. 그러나, 한서(漢書)에는 모두 82편, 도(圖) 9권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로 미루어 손자 말년에 추가로 저술한 부분과 후세에 의해 증편된 부분이 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사마천의 『史記』 「사기열전」에는 손무가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왕 합려에게 등용되어 군무(群舞)를 시범 보이면서, 군율을 어긴 이유로 왕이 아끼는 두 비(妃)를 처형하여 기강을 바로 세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손자병법』의 영향과 위상
『손자병법』은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세상에 알려졌고 전국시대에 널리 전파되어 병법서로 통용되었다. 『손자병법』은 의미가 함축적이고 심오하여 일반인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이에 오래전부터 많은 전문가들이 해설서를 내놓았다. 현존하는 해설서로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曹操)가 쓴 『손자약해(孫子略解)』이다. 조조는 전장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고, 『손자병법』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무경칠서 중 하나인 『이위공문대』의 저자인 이정(李靖)도 『손자병법』을 최고의 병법서로 치켜세웠다. 이 외에도 당나라 때의 두목(杜牧)과 진호(陳皥), 송나라 때의 매요신(梅堯臣) 등 많은 사람들의 해설서가 있다.
서양에서도 나폴레옹이 전쟁 중에도 『손자병법』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리델하트의 『전략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리델하트는 『전략론』에 『손자병법』의 여러 문구를 인용하였다. 미국과 러시아도 『손자병법』을 연구하여 군사사상으로 발전시켜 왔다.
우리나라도 『삼국사기』의 「계백열전」에, “昔句踐以五千人破兵七十萬衆, 今之日宜各奮勵決勝以報國恩.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워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계백 장군이 5만의 신라 군사와의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오천 결사대에 향해 연설한 내용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우리나라는 고조선 시대 이전부터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병법서의 교류도 있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조선시대 무과시험에는 『손자병법』을 포함한 무경칠서가 시험과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에서도 『손자병법』을 ‘세계 제일의 병서’로 평가하면서, 손무를 ‘동양 군사학의 창시자’로 평가하고 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손자병법』을 연구하고, 『손자병법』을 전쟁의 지도서로 삼았다. 『손자병법』에 관하여 중국인들보다 더 연구하고 실전에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중국 지도를 완성한 사람은 모택동이다. 모택동도 『손자병법』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중일전쟁 기간에 『손자병법』을 활용한 지시문을 자주 하달하였는데, 특히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를 과학적인 진리라 하기도 했다.
이상을 고려해 봤을 때, 『손자병법』은 동서고금을 통해 최고(最高)의 병법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1편 시계(始計)
『손자병법』의 첫 편은 ‘시계(始計)’, 곧, 계책을 시작한다는 의미로, 전쟁을 국가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지켜야 할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전쟁은 국민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므로, 전쟁 전에 쌍방의 정치, 경제, 군사, 천시, 지리, 군주, 장수의 능력 등의 전력 비교 요건을 통해 철저히 승산을 따져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손자는 전쟁은 신중하게 계획하고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편인 ‘용간(用間)’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속임수이므로 적을 속이되, 적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손자병법』은 아군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적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국가적 차원의 전략으로부터 세부적인 전투기술까지 포괄하고 있다. 『손자병법』은 승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약한 적이라도 준비 없이 경솔하게 접근하면 승리하기 어렵기에 신중론을 담고 있다.
전쟁 수행 과정에서 주도권이 없거나 불가피하게 전쟁의 상대가 되는 약자로서는 전쟁에서 승리해도 큰 피해를 보기 때문에 사전에 전쟁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상대가 함부로 넘보지 못하는 적정 수준의 대비태세를 갖추거나, 평상시에 도발하는 상대에게 예상보다 훨씬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전쟁해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패배해서는 안 된다.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곧 국가 멸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당위성이다.
‘始計’의 ‘計’는 크게 ‘계획’과 ‘계책’, ‘계산’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혹자는 ‘계획’이나 ‘계책’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며, ‘계산’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국과 자국의 전반적인 국력과 전력을 비교하여 승산을 파악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국가 차원에서 전쟁을 계획하는 데 있다. ‘始計’ 편은 이러한 승산의 파악(계산)을 통해 국가 차원에서 전쟁을 기획하고, 군사전략·작전 차원에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의 의미는 ‘국가전략’이나, ‘군사전략’, ‘군사작전’, ‘군사계책’ 등 이러한 본질적 의미를 담고 있으면 어떻게 해석하든지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