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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8551893
· 쪽수 : 336쪽
· 출판일 : 2023-09-20
목차
작가의 말 4
— 나의 정서를 키워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사해
묵호댁 9
두 얼굴의 여인 45
그 애 71
평정 찾기 99
의심 121
연초중독 143
그 사람 163
설화 195
유리병 하얀 새 221
해설 327
— 세계와의 불화, 또는 그 치유의 잠재력(김종회, 문학평론가)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래도 남편의 그늘에서 살 때가 참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묵호댁은 고단한 몸을 무덤에 기대었다. 멀리 산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묵호댁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묵호댁은 눈을 감았다. 아련했던 그 옛날, 행복했던 한때가 묵호댁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묵호댁' 중에서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화려한 날개를 활짝 펼치고 원 없이 드넓은 하늘을 날아올라 너울거리며 춤추고 싶었다. 훌쩍 뛰어올라 눈부신 태양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을 하려던 그 순간 섬광이 번쩍였다. 우레와 같은 천둥, 빗발치는 소낙비가 사납게 쏟아졌다. 날아올라 허공을 맴돌 사이도 없이 무참히 날개가 꺾이어 추락하고 만 것이다.
‘이게 아니었는데, 정말 이런 게 아니었어.’ -'평정 찾기' 중에서
오늘따라 두꺼운 가면을 뒤집어쓰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한층 익숙해진 아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가 가면을 뒤집어쓰는 것에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무너지기 직전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보호본능처럼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가면을 쓰고 자신을 대하는 게 오히려 감정을 더 알기 쉽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그런 걸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뜻일까? -'의심' 중에서
사실 나는 백합꽃봉오리와 잎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칼처럼 자라난 잎 사이에서 무언가 혹 같고 뭉친 근육 같은 것이 부풀어 오른다 싶으면 그것에서 꽃이 피어났다. 백합의 꽃봉오리는 꽃봉오리라기보다는 오히려 기형적인 잎 같았다. 나는 뒤틀린 것 같은 꽃봉오리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는 것이 못내 신기하고 좋았다. 혹처럼 솟아난 꽃봉오리가 점점 벌어져 풍선처럼 터질 때까지 자꾸자꾸 들여다보았다. 꽃이 피어나는 동안 꽃봉오리는 아프지 않을까? 그러나 기다리다 보면 어김없이 커다란 혹에서 꽃이 터지듯 피어나오곤 했었다. -'설화' 중에서
이제는 백지처럼 투명해졌다고 자신했었다. 그렇게 자신했던 믿음이 깨진 쪽박처럼 흉측하고 처참하게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것은 표백하듯 덧입힌 한쪽 모서리에 얄밉게 박혀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죽은 듯 웅크리고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믿음을, 자만을 통쾌하게 비웃으면서 말이다. -'유리병 하얀 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