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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유럽사 > 동유럽사
· ISBN : 9791169090278
· 쪽수 : 408쪽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제1장 스키타이: 기마와 황금의 민족
스키타이의 등장 | 스키타이인의 건국 전설 | 건국 전설 이설異說 | 유목민 | 능란 한 기마술을 지닌 용감한 전사 | 동물 의장意匠과 황금에 대한 편애 | 그리스 세계와의 연관성 | 스키타이의 멸망
제2장 키예프 루스: 유럽의 대국
키예프 루스는 누구의 것인가 | 슬라브인의 등장 | 하자르한국 | 키예프 루스의 건국 | 볼로디미르 성공聖公과 야로슬라프 현공賢公 | 기독교로의 개종 | 모노마흐 공의 정훈 | 몽골의 정복 |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 | 키예프 루스의 사회와 문화
제3장 리투아니아-폴란드의 시대
암흑과 공백의 3세기? | 리투아니아의 확장 | 폴란드의 진출 |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 | 리투아니아-폴란드 지배하에 놓인 우크라이나 | 유대인의 낙원 | 우니아트의 탄생 | 모스크바 대공국과 크림한국의 대두 | 우크라이나의 어원
제4장 코사크의 영광과 좌절
코사크의 출현 | 정치적 세력으로의 성장 | 조직과 전투 방법 | 국민성과 생활 | 선구자 사하이다치니 | 흐멜니츠키의 봉기 | 헤트만 국가의 형성 | 모스크바의 보호 아래 | 흐멜니츠키의 최후 | ‘황폐’의 시대 | 헤트만 마제파 | 폴타바 전투 | 최후의 헤트만 | 러시아로의 병합 | 우안 우크라이나 | 신新러시아현
제5장 러시아・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두 제국이 지배하는 우크라이나 | 러시아 제국하의 우크라이나 | 발자크의 저택 | 데카브리스트의 난과 카미안카 | 크림전쟁 | 국민 시인 타라스 셰브첸코 | 내셔널리즘의 고양과 정당의 성립 | 오스트리아 제국하의 우크라이나 | 신대륙으로의 이민 | 곡창지대와 항구 도시 오데사 | 공업화 | 우크라이나 출생의 예술가와 학자
제6장 중앙 라다: 짧은 독립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왜 유지되지 못했는가 |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 일본인의 키예프 방문기 | 볼셰비키의 등장 | 독일군의 꼭두각시 | 서우크라이나의 독립 | 디렉토리아 정부와 내란 | 최후의 승리자, 볼셰비키 | 재고: 독립운동은 왜 실패했는가
제7장 소련의 시대
4개국으로 갈라진 우크라이나 | 우크라이나화 정책 | 스탈린의 권력 장악 | 농업 집단화와 대기근 | 스탈린의 숙청 | 폴란드 지배하의 서우크라이나 | 일본 군부와 우크라이나 독립파의 접촉 | 제2차 세계대전 | 얄타회담 | 일본인 억류자 | 전후 처리 | UPA의 파르티잔 활동 | 흐루쇼프 시대 | 브레즈네프 시대
제8장 350년 동안 기다린 독립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 독립 달성 | 우크라이나의 장래성 | 우크라이나와 일본
우크라이나 역사 연표
참고문헌
책속에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인지의 여부에 따라, 자기 나라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러시아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단순한 신흥국인지를 가늠하는 국격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논리는 이렇다. 모스크바를 포함한 당시 키예프 루스 공국의 동북 지방은 민족도, 언어도 달랐고 16세기가 돼서야 핀어 대신 슬라브어가 사용되었을 정도다.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비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이지, 키예프 루스 공국의 후계자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가혹한 전제중앙집권 체제인 러시아·소련의 체제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체제는 전혀 다르므로 별개의 국가다.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치·사회·문화는 몽골에 의한 키예프의 파괴 이후에도 1세기에 걸쳐 현재 서우크라이나 지역에 번성한 할리치나·볼린 공국으로 계승되었다.
14세기 중반 할리치나-볼린 공국이 멸망한 후 17세기 중반 코사크가 우크라이나의 중심 세력이 되기까지 약 300년 동안 우크라이나 땅에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정치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기간에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다. 과연 이 시기는 우크라이나에게 완전한 암흑의 시대이자 공백의 3세기였을까?
키예프 루스 공국 시대에는 거의 전역에 걸쳐 단일 루스 민족을 이루었지만 이 시기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세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 요인 중 하나로 과거의 키예프 루스 공국이 이 시대에는 모스크바 대공국,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분할되어 장기간 고정된 것을 들 수 있다. 키예프 루스 공국 말기부터 이미 분화가 시작되었다고 추측되는 언어도 이 시기에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로 각각 독립된 언어가 형성되었다. ‘우크라이나’라는 지명이 만들어지고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우크라이나답다고 할 수 있는 코사크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기는 냉엄한 3세기였던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정체성 형성을 위해 더없이 중요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키예프가 쇠퇴하는 동안 우크라이나 동북쪽에서는 공국 중에서 모스크바 공국이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1480년 모스크바 공국이 킵차크 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2세기에 걸친 ‘타타르의 멍에’는 끝났다. 제2의 로마라 할 수 있는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에 모스크바는 자신들이야말로 ‘제3의 로마’이자 기독교 세계의 맹주가 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이반 3세는 ‘전全 루스의 군주’로 칭하고 예전 키예프 루스 공국이었던 땅을 두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15~16세기에 모스크바 대공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예전 키예프 루스의 땅을 둘러싸고 장기간에 걸쳐 싸웠고, 모스크바는 서서히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도려내갔다. 이로써 리투아니아는 체르니히우, 스몰렌스크, 폴로츠크 지방을 잃게 된다. 이반 4세는 최초로 ‘차르’로 대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