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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71714131
· 쪽수 : 96쪽
· 출판일 : 2025-04-23
책 소개
목차
사는 사람
작가의 말
정이현 작가 인터뷰
저자소개
책속에서
죽도록 열심히 살 필요는 없다고 가르친 건 부모님이었다. 요만한 위장을 달고 나왔으면서 미련하게 그걸 모르네. 저러다 짜구 나지. 옆집 개를 두고 엄마와 아빠가 사이좋게 흉보는 동안 일곱 살의 나는 납작한 배를 남몰래 손바닥으로 눌러보았다. 허튼 데 힘 빼지 말고 생긴 대로 대충 행복하게 살다 가면 된다는 것. 그것이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의 보편적 세계관이었다.
"82동이라니까. 이건 정말 레어한 기회야."
우재에게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일까, 기회를 놓치기 아깝다는 마음이 나에게도 있었다. 강력한 소망에는 강력한 전염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당직을 바꿔달라고 동료에게 부탁해야 했다. 고향의 엄마가 편찮으시다는, 누구도 믿지 않을 만큼 진부해서 도리어 거짓말 같지 않은 거짓말을 했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잠깐이라도 누워 있고 싶었다. 혼자뿐이지만 침실로 가서 방문을 꼭 닫았다. 침대에 가만히 누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조차도. 이 고요함 속에서 비로소 조금 마음이 놓였다. 지금 사는 곳은 방 하나, 거실 겸 주방 하나, 욕실 하나로 이루어진 실평수 아홉 평짜리 집이었다. 몇 발짝 걸으면 욕실, 몇 발짝 걸으면 주방, 몇 발짝 걸으면 침대였다. 그러나 각 공간은 벽과 문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나누어져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스무 살에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기숙사에 살았었고 그 뒤엔 여성 전용 고시원에 살았다. 처음 제대로 된 원룸을 구해 이사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듯이 기뻤다. 하지만 침대와 싱크대와 다용도 테이블이 한 공간 안에 다닥다닥 붙은 원룸 생활자로 몇 해를 지내고 나니 최소한의 공간 분리에 대해 진지한 염원을 가지게 되었다. 때론 '나로부터 나를 분리'하고 싶은 날도 있는 것이다. 종종 내가 칸이 나뉘지 않은 도시락 반찬 통에 담긴 계란말이 같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반찬통의 뚜껑을 열어보면 배추김치와 메추리알 간장조림과 계란말이가 영향을 주고받아 서로에게 스며든 상태. 김치 양념이 묻은 계란말이를 그대로 먹어야 하는 이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과는 진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