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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75011144
· 쪽수 : 216쪽
· 출판일 : 2026-09-03
책 소개
목차
1 사물 가는 대로
멀리 간 공
투수
단톡방
한눈팔기
산길에서
아모르 파티
종이컵
나는 모나리자
국화빵
수채화
2 사물의 구멍
신발 한 짝
두쫀쿠
리지윤, 림지영
사평역
책상이 있던 자리
귀빈
셀프
천재
가챠
골목골목
3 사물의 일상
호랑이 꼬리
운세
보이스 피싱
〈싱어게인〉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꽃과 더불어
보수동 헌책방 골목
벤치 클리어링
소설 청탁을 받아 놓고
진위의 숲
아이 엠 복서
4 사물하는 마음
권총
성냥개비
낙엽
단추
명함
명
바코드
담배
모자
광어
저자소개
책속에서
자, 칠 테면 쳐라! 나는 타석을 향해 공을 던진다. 바위같이 무겁게만 여겨졌던 공이 내 손을 떠났지만, 전혀 홀가분하지 않다. 내가 뿌린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해 포수의 글러브에 쏙 들어갈지, 대포 방망이에 맞아 허공으로 솟구쳐 높고 긴 궤적을 그을지, 내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올지 공만이 안다. 내 손을 떠난 공은 내 것이 아니다.
이런 상상을 하니 내가 정말 투수가 된 것 같다. 끊임없이 타자와 수싸움을 해야 하는 투수는 몇 갈래의 길에서 갈팡거리는 우리네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포커페이스에 능하지 못한 우리는 견제구를 날리거나 로진 가루를 손에 묻히면서 불안함을 애써 감춘다. 내가 만든 페이크 구간에 내가 빠지곤 한다. 투수 입장에 서 보니 세상을 대처하는 데 유인구와 직구만으로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투수」 부분
인도의 한 청년이 왜 자신을 낳았느냐며 부모를 고발했다고 한다. 자신은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부모가 그를 낳았다는 거다. 청년은 학업과 취업을 위해 경쟁해야 하는, 그야말로 삶은 고해(苦海)인데 부모는 즐거움을 위해서 자식을 낳았으니 자식한테 평생 생활비를 지불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청년의 엄마는 변호사답게 ‘네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 아빠가 어떻게 너에게 사전 동의를 구할 수 있었을지 합리적 설명을 제시한다면 내 실수를 인정하마’라고 맞받았다. 누구도 청년의 변호사로 나서지 않아 소송은 지지부진했다. 변호사들도 청년의 부모가 청년을 낳아 주어 세상 구경시켜 준 것만으로 고마워해야 할 텐데 웬 시비인가 싶었을 거다. 인도의 저 청년만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졌다. 저런 식으로 부모에게 소송을 제기하면 법원은 주민 센터처럼 동네 곳곳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보다 웬만한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았다면 태어나고 싶은 이가 몇이나 될까.
―「아모르 파티」 부분
비닐이나 수저 같은 일회용을 쓸 때마다 죄책감이 이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거다. 나는 웬만한 것은 일회용품을 거의 쓰지 않지만, 종이컵은 쓰고 있다. 믹스커피만큼은 사기나 유리잔 따위보다 종이컵에 타 마시는 게 맛있다.
내가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종이컵에 커피가 나오기 때문이다. 공원이나 휴게소에 커피 자판기가 보이면 믹스커피 한 잔부터 뽑고 본다. 아무리 더워도 커피는 따뜻해야 제맛이다.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라면 말해 무엇하랴. ‘종이컵 믹스커피가 폐에서 생기는 일’ 따위의 글은 안 읽는다. 그런 글을 일일이 읽는다면 세상에 맛있게 먹을 만한 게 없다.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한다. 믹스커피 자판기가 병원 로비에 턱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 일단 안심한다. 나는 교회 아줌마가 타 준 커피 맛을 다시 음미하려고 믹스커피를 한 잔 탔다. 믹스커피 봉지 대신 찻숟가락으로 저었다. 팔팔 끓은 물을 종이컵에 붓자, 컵은 금세 흐물흐물해졌다. 뜨겁지만 잡을 만했다. 액체의 온기에 따라 찌그러지는 모양새가 달라지는 것은 종이컵의 특징이다. 종이컵은 물기가 닿으면 축축해지고 형태를 다소 잃어 종이의 물성을 드러낸다.
―「종이컵」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