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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나무

아홉번째 나무

오세아 (지은이)
성진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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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나무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아홉번째 나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5418193
· 쪽수 : 368쪽
· 출판일 : 2024-05-06

목차

추천사
서문

손님 오시는 날
시민 아파트
그 녀(1)
고장난 컴퓨터(1)
하늘이 내린 집
공순이
고장난 컴퓨터(2)
어홉 번째 나무
여섯시 오 분 전
그 녀(2)
그 날 아침
욕쟁이 할멈의 외출

책속에서

저자 서문
알 수 없는 의욕
작가라는 과분한 칭호
“이번에 여성동아에….”
비록 시간강사이나마 어엿한 직업이 따로 있는데도 지난 일 년 동안 이렇게 소개되어왔다. 만약 강사라면 ‘나부랑이’, 하고 무심코 넘겼을 어떤 분들이 한번쯤 다시 쳐다볼 때마다, 쳐다보는 이유야 ‘너도 쟁이냐?’ 하는 경멸에서부터 ‘재주 용하네.’ 기특히 여김까지 각양각색일 테지만,나는 실실 웃으면서 뒷걸음치곤 했는데, 까닭은 여성동아에서 받고 있는 은혜에 비해 내 보답이 지극히 미온적인 것을 자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일 년이 되어 가면서 ‘이번에’ 대신에 ‘요새도 글 쓰냐?’ 하는 인사를 받게 되고 그것이 거듭 되면서 은혜의 무거움을 새롭게 느끼게되자 은혜 받은 고마움을 알면서 갚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가끔 지상에서 쓰지 ‘못하는 현실’을 화제 삼은 글을 대할 때가 있다. 시인이 그것을 노래하면 평자가 얼른 받아 ‘그것에의 안타까움을 잘 나타냈다’고 쓴다던가, 유명인사가 돌아가며 쓰는 수필이나 수상란에서 구체적 지적 없이 알아들을 련 하고 짧게 언급되는 의도적 표현 등 이렇게 지상에서 대하는 이외에 도대체 무엇을 어떡해서 쓰지 못하게 되어버린 현실인지 조금도 알 수 없는 나는 종종 아래와 같은 의문에 부딪힌다. 누가, 왜 못쓰게 하는 것인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써야 할 이야깃거리라면 못하게해서 붓을 놓는단 말인가? 언제는 작가가 쓰기 편한 상황에서만 글을 썼었던가? 하는 의문 말이다.

작가에게 부여되는 위대성은, 바로 상황을 초극한 그의 힘 때문에, 사실의 진위를 가려내고, 진리의 길로 이끌어 가는 그의 성실성 때문에, 그리고 그런 일을 위해서 우직하리만치 자신을 돌보지 않는 그의 정직함때문에 비롯되었을 터이고 동시에 이것은 작가만이 가는 특권으로서 십분 활용해야만 의무마저도 있는 것일 텐데. 고로 쓸 건 쓰기 위해서 ‘쓰지 않곤 못 배기는 현실’ ∼그것이 정녕 모든 작가가 공통적으로 절감하는 현실이라면∼을 정직하게 쓰고 그에 대한 도전[그게 무엇인지 몰라도]과 맞붙어 싸워야 할 것이며 그러다 쓰러진다면 그 다음 주자가 바톤을 이어받고 또 이어 받고…. 하던가, 그게 아니라면 그 ‘쓰지 못하는 현실’을 슬쩍 돌려 ‘쓰는 현실’로 비유하는 재간이라도 키워야 할 게 아닌가? 사람이 한번 일생을 걸고 마음먹은 일은 언젠가는 한 번 반드시 해내고 마는 성정임에랴.
등단 전 이것이 나의 생각이었고 또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나는 ‘쓰지 못하는 현실’을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경험하고 아하! 이래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자취도 없이 수많은 신성들이 사라졌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데뷔하면서 곧 나는 잡문청탁을 받았다. 그 글이 실리고 글 끝에 작가라는 칭호가 주어졌을 때 너무 송구스럽고 생소해서 흐응! 하는 느낌이들었었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그런 칭호가 너무 쉽게, 이제 시작하려는사람에게 주어졌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런 과분한 칭호에 비해 소견을 펼기회는 좁은 문의 좁은 문이다. 지면을 할애해주는 배려가 감사해서 받는 청탁의 대부분은 제목을 정해 준 잡문, 그래서 아무개는 여성동아에 잡문이나 쓰지 하는 낙찰이 나는 몹시 두렵다. 아무개라는 이름 석자만 읽고 팽개칠 소수의 독자도 또한 두렵고 또 두렵다. 이렇게 소수의 두려운 독자를 의식하니 잡문이나마 소신껏 쓸 수가 없 게 되었는데 그 위에 쓰고 싶던 이야기 대신에 다른 것을 그것도 기한 안에 써야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짧은 생각과 무딘 붓끝이 급기야 원고지 메꾸는 일을 궁상스럽고 짜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마감 날짜라는 마력 그러나 이 마감날짜가 쓰게 하는 힘도 된다.지난 여름 한 달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지독한 더위도 잊고 밤낮으로 원고지와 마주 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이 마감 힘이다. 마감이 아니라면 까짓 ‘한달쯤 죽어지내지.’ 하는 생각도 감히 먹지 못했을 터이고 가장 아끼는 눈이 점점 나빠지는 아픈 과정도 견디지 못했으리라. 올해는 방학 두 달을 마감이 없으니까 국사책 읽네 하며 펀펀 놀고 보내자니 노는 것 같지 않게 쉰걸 봐도 분명하다.
책이 한 권 나오고 크게 얻은 게 있다면 ‘원서읽기에 바빠’하는 허울 좋은 핑계대고 소홀했던 현대작가들의 작품과 잡지를 손에 닿는 대로 읽으면서 그들의 지구력과 인내를 함께 배우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환절기라서 그래요.’ 하는 비약, ‘우루루, 우루루, 소리를 내며 비가 되어 만나고 싶다는’ 그래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는 외침. ‘에익, 신 가놈’한다는 구보씨. 기차를 배음으로 ‘노형도 그 여자를 기다리는 겁니까?’노형도 ‘하는 절규. 자현에의 판정패를 자인하며 ’부드득 이를 간, 정은‘ 밀감 두 개 놓고 화해 할 수 있었던 따뜻함. 그리고 ‘미친 여자의 자궁이라도 빌려 씨받이를 도모한 백정’의 천맥. 이런 대목을 마주칠 때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작가들에게 오랜 친구 같은 따뜻한 정을 느낀다.
그리고 또 있다. 동문이면서 먼저 당선된 정 혜연 씨의 글을 읽었느냐는 질문이 거듭되자 허겁지겁 민망히 구해 읽은 ‘배회하는 바위들’때론 시어 같고 때론 경귀 같은 문장, 작가의 체취가 밴 도도한 흐름,[젊은 작가란 비록 ‘현지처’를 소재로 할망정 도도하고 볼일이다.] 때론구질구질한 이야기도 하나도 구질구질 하지 않은 느낌으로 번져 나오게 한 철학적 통찰과 인지. (아직 나는 이런 것을 빼 놓고는 글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대목에서 감격해 버리는 버릇은 아마 공감 때문이리라. 애초에 글을 쓰고자 한 뜻은 같은 생각을 가진 보다 많은 친구를 글로써 얻으려고 했던 데 있는 듯하다. 그러기에 다른 이의 글을 읽고 ‘그게 아닌데’ 라고 느껴질 때마다 감히 그게 아닌 내 생각을 펴 보려고 작정했고 똑같이 겪는 어떤 사건을 두고 그런 결과를 낼 수 밖에 없었으리라고 몰고 가는 추리 내지 판단에도 ‘그럴 리 없을 텐데’ 하는 주장으로 발전하면서 쓰고 자 하는 욕구는 강하게 일어선 것 같다. 물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떤 일을 목격할 때 ‘그럴 수 없는 건데’ 하는 분노도 곁들어 거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학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기능과 내가 살아가려는 태도가 부합하고 있다는 자부심에서였던 것도 무시하지 못 하겠다. ‘젊어서 바르게 살고, 깨끗이 늙고’ 그러는 가운데 사회의 한영역을 차지하며 그렇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영역에 도전 할 수 있는 방편 중 하나로써 문학이 손색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것은 참으로 등단 전 막연한 상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실천의 과정에서 나는 날로 새롭게 느낀다.
사회생활에서 채색되는 몇 겹의 위선이나 몇 겹의 혼돈을 벗겨내면,부표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어떤 핵심만 갖고 쉽게 글이 되진 않는다.내가 부딪히는 장벽은 언제나 표현이다. 그렇다고 구상은 쉽게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일단 어떤 주제가 설정되면, 그 주제를 뚜렷하게 부각시켜줄 내용을 찾아 몇 개의 사건을 점진적으로 전개시키면서 앞뒤에 모순이 없게 짜 맞춘다.
앞에 무심코 던져 준 단어 하나까지라도 반드시 뒤에 어떤 사건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완전히 구상이 끝나야만 비로소 펜을 들고 쓰기 시작하는 버릇을 가졌기 때문에 버스 속에서나 머리를 쓰지 않는 집안일을 할 때나 자리에 누워 잠들기 전 후에나 등, 여간 다른 일에 몰입하지 않는 한 언제나 설정된 주제로 구상에 열 올리니 어떤 분 말씀처럼 천형까지는 못되더라도 마치 늘 악운을 짊어지고 다니는 기분이다.그렇다고 주제를 많이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납득이 가고 필연적 이라고까지 여겨질 정도의 무엇이 어느 날 홀연히 떠오를 때까지 맥 놓고 기다 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 창작은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선택해 보는 작업(자기 자신을 시험하는 힘든 작업이란 뜻에서)이 아닐까? 하는 회의마저 품어 볼 때가 있다.

원래 소설을 쓰는 일보다 소설을 분석하는 학문을 먼저 배우면서 기교니, 구조니, 하는 객관적이고 개연성을 찾는데 정확을 기하다보니 직관을 독특하게 표현하는 비합리적이고 감각적일 수도 있는 창작이 지나치게 독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그 때마다 내가 쓴 글을 사람이 많은 곳에서 펴들고 읽어보면서 부끄럽지 않게 느껴지면 내 주리라 다짐하지만 질질 끌다 마감이 닥쳐야만 급하게 쓰는 못된 버릇 때문에 막상 방구석에 앉아 되읽어 볼 여유조차 마련 못하는데다가 일단 쓴 글은 꼴도 보기 싫어 책방앞도 외면할 지경이니 하물며 작중인물을 놓고 의견을 나눠보려는 독자는 피 할 수 밖에.

불안과 불신
작년 한 달 그것을 쓰는 내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느낌은 불안과 불신이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발표가 되고 차점자에 대한 칭찬이 쏟아져 나오자 나는 그분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었다. 결국 그것이 승자의 알량한 여유같이 보여질까봐 질끈 참기는 했지만 편지 쓸 작정을 한 동기는 아직 나는 좀 더 참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선자의 기호나 취향에 따라 다분히 좌우 될 가능성이 있는 당락을 놓고 에라 이번 한번 해보고 관두지 하는, 혹은 그 이상의 어떤 불안과 불신이 그 분에게도 있어, 쓰고자하는 소신을 꺾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으나 과연 글이라는 게 누가 뽑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쓰고 말고 할 성질이 아닌 것이므로 흘려버리고 말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지극히 유치하고 쓸데없는 걱정같이 보일 이야기까지 이런 기회를 빌려, 써보려는 이유는 관문을 놓고 제법 유언비어가 돌고 있는 듯한 인상의 질문을 수차 받았기 때문이다. 언뜻 기억나는 대로 예를 들어 보면, ‘정말 원고는 내리닫이로 써야 하느냐?’ (심사위원이 세로로 쓴 것에 익숙해서 가로로 쓴 것은 읽어보려고도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가로로 썼다. ‘심사위원 중 어느 분께 사사한 적이 있느냐?’,‘여성잡지라는 걸 십분 감안해서 나긋나긋 써야 된다는데.’ 등이다.잡문이나마 건네주고 그것이 인쇄된 책을 되받으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운다.비록 내가 썼어도 일단 원고가 내 손에서 떠나면 그 때부터 그것이 공기가 된다는 게 첫째로 배운 점이다. 쓰고자 하는 생각이 구체적 표현으
로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을 때 낑낑 근사치에 맞춰 써서 건네주고 마자 아차 이렇게 쓰는 건데, 하는 생각이 뒤따라 일어나도 단념해야 한다던 가, 그 모델이 누구가 아니냐? 아무 인물은 이렇게 그렸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작가의 생활이 곧 소설에 옮겨진 것 같은 착각들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사람들의 지독한 선입견도 하나의 무시 못 할 생활패턴이란사실의 재인식이다.
가령 내가 써준 원고에서 누군가 친절히 고쳐 준 단어, 혹은 문장을 발견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투’가 ‘꼴’이 하는, 뜻으로 쓴 ‘품’이라는 말이 ‘폼’이라고 고쳐져 써 있다던가, ‘역성이셔’라는 편든다란 말을 ‘역정이셔’란 화낸다란 뜻으로, 혹은 내 딴에 기교를 부려 본 ‘사람, 그런 사람, 그런 깨끗한 사람이다’라고 단어에서 구, 그리고 문장으로 옮겨 간글을 한데 뭉뚱그려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 주는 것.등.

물론 어련히 잘 알아서 해주실려구, 하는 의타심으로 구두점, 휴지부 등을 정확히 찍지 않는 내 졸필에 원인은 있다.
고로 ‘어련히’ 하는 의타심이나 ‘이런 풋내기’ 하는 피차의 선입견은모두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걸 배우게 된 셈이다.
이런 불평으로 그나마 잡문 쓸 기회마저 놓치는 게 아닌가 하고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서 마침내 써도 좋은 소리와 써선 안 되는 소리의 구별마저 혼동하기에 이르렀는데, 마감 날자는 내일로 다가오고, 그런데 이 모두가 작가로서의 나를 보다 크게 키우는 채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면서, 고맙게도 쓸 여유가 생겼다. 비록 악운을 걸머진 기분이라도 끝이 좋아야 한다니 원고지와의 씨름은 계속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훈련을 쌓을 작정이다. 영어에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뜻을 전하는 정확한 어휘가 풍부한데 비해 우리말은 그렇지 못하다. 어휘가 곧 문화의 척도라는데 부족한 언어를 풍족하게 하는 일에 주력하시는 선배작가를 이을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면 그 보다도 더 다행한일은 없겠다.
서두르지 않으련다.
삼년 혹은 오년에 한 편이라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써 볼 생각이다.
갑자기 높아진 하늘, 서늘한 바람, 맑은 물소리, 그 어느 것 하나 가슴에 저리지 않은 것 없이 불안하고 불신스럽다가도 아침에 그 푸르스름 한 공기를 헤치고 나서면 내 가슴은 또다시 알 수 없는 의욕으로 힘차게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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