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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91185851068
· 쪽수 : 256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교통사고
기초생활수급
아뻬(충수염)
이시이
도쿄
방귀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손 씻기를 마치고 세 사람은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이와이와 사토는 소년의 배에다 갈색 베타딘을 발라 소독한 뒤 선명한 녹색 천을 덮어씌웠다. 천의 한가운데에는 네모난 구멍이 나 있어서 소년의 복부만이 드러났다. 그 순간부터 소년은 얼굴도 팔다리도,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가족도 친구도, 그 인격조차 없는 그야말로 ‘복부’ 그 자체가 된다.
외과 의사에게 있어서 환자의 인격은 그 치료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라고 무슨 생각을 하며 누구를 사랑하는지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의 일부인 피부, 근육, 장기, 혈관, 신경, 조직을 대면할 뿐이다. 이 ‘천 가리개’는 그런 용도에 딱 맞는 아주 훌륭한 발명품이었다.
혼자 남겨진 류지는 회의실 불을 켜고 프로젝터와 스크린을 정리하며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BSC를 생각 중입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도대체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걸까. 94세라는 나이. 치매. 가족이 없다.
그러니까 그의 생존은 종료되어도 된다? 의료비가 전액 무료인 기초생활수급과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 수술을 하면 몇 년은 더 살 수 있을 테고 적어도 입으로 밥을 먹을 수 있게는 될 것이다. 전혀 수를 쓰지 않는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수술을 하는 게 옳은지, 안 하는 게 옳은지. 단지 수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수술하는 게 맞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본다면 어떨까. 수술을 해서 그의 생명이 연장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 사회 전체로 보면 부담만 증가할 뿐일까…….
류지로서는 알 수 없었다. 마음만 답답해진 류지는 회의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다행히 다쿠마는 발관 후 호흡과 혈압이 모두 안정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과의 중증환자가 ICU로 들어오게 되면서 ‘밀어내기’ 형식으로 일반병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병원에는 ICU 환자를 일반병동으로 옮길 때 반드시 의사가 동행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류지는 그 이유가 늘 궁금했다. 만약 의학적으로 의사가 동행하는 게 안전하기 때문이라면 의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 같은 햇병아리 인턴을 붙이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결국 인턴 인력을 ‘침대이송요원’으로 활용하겠다는 거겠지. 류지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침대이송’이라 하면 말은 쉬워 보이지만, 환자가 누워 있는 침대를 조심스럽게 밀어서 병원 안을 이동하는 것인 만큼 꽤나 힘든 일이었다. 이것도 나름의 기술이 필요했다. 아직 침대를 미는 데 능숙하지 못한 류지는 침대를 이리저리 벽에다 쿵쿵 박곤 했다. 과연 이날도 침대 돌리는 방향을 틀리고 말았다.
‘침대 미는 것도 제대로 못 하냐.’
그런 생각이 들자 류지는 자괴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