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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85923185
· 쪽수 : 208쪽
· 출판일 : 2016-11-30
책 소개
목차
염소와 나와의 촌수 복효근
칠백만원 박형준
젓갈골목은 나를 발효시킨다 이가희
창 노향림
고요의 결 조창환
계백의 달 윤순정
9월 헤르만 헤세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김기택
투명에 대하여 허영자
영동에서 김사인
뺄셈의 춤 이성미
풀의 증상 최문자
공 안명옥
야간 학교 권기만
생각의 사이 ?김광규
로스트볼 최정란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회전목마 황성주
금강 안홍렬
갑천에서 김명수
한빛에게 주는 시 도한호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24시 편의점 이은심
나이테 송계헌
봄비 이수복
신발의 꿈 강연호
바지를 입는 법 강기화
식당 프랑시스 잠
저녁의 정거장 천양희
모래 이형기
봄 밀레이
봄밤 김대성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김도연
콩 박재현
모든 삶이 나에게 정공량
늙은 황소의 눈물 김형태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김선우
집들의 감정 마경덕
어머니 손기섭
당신 곁에 타고르
집시 세 사람 레나우
꽃의 일생 유재철
배추꽃 최대규
생각하는 관계 이만섭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이외수
국경 간이역에서 배정웅
수리수리 코끼리 백애송
별 권선옥
시간을 잃기 위하여 김경년
캘리포니아 킹 사이즈 전희진
내 안의 노루귀 김광순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박 준
조국 정완영
아르바이트 소녀 박후기
합장 고?은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송찬호
어린 것 나희덕
엄숙한 시간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절간이야기 조오현
접는 의자 이은봉
(연재순)
시를 전하는 따뜻한 문을 열고
저자소개
책속에서
염소와 나와의 촌수
복효근(1962~ )
햇살 짱짱한 봄날
팔순 어머니와 나와 내 딸 선혜, 인혜와
산모퉁이 돌아가며 냉이를 캔다
저 쪽 언덕엔
겨우내 새끼를 낳았나 보다
비쩍 마른 어미 염소가 새끼를 데불고 나왔다
염소와 사람 촌수가 이렇게 가깝구나
풀과 나물이 한 끗 차이듯
초식의 유습을 공유한
한 끗 차이도 안 되는 짐승으로
우리는 새순을 뜯으며
함께 햇살을 나누고 있구나
오늘은 전생과 내생도 한 뼘 차이로 가까워서
어머니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손녀들에게 자꾸자꾸 풀이름을 가르치는데
아무래도 나는
저 염소에게 가서
댁의 성씨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봐야 되겠다
요즈음 같은 봄날의 한 풍경일 것이다. 구질구질한 사회의 일들일랑은 잠시 잊어버리고 우리 동화의 나라로 들어가 볼까. 시인에게는 복도 많은지 딸이 둘이다. 햇살 짱짱한 봄날 산모퉁이에는 팔순 어머니와 시인의 두 딸이 냉이를 캐고 있다. 냉이 뿌리에서 퍼진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했을 것. 또 저쪽에는 겨우내 새끼를 낳았는지. 비쩍 마른 어미 염소가 새끼를 데리고 마실을 나와 있다. 염소 새끼의 숫자는 밝히지 않았으되 대략 세 마리가 적당할 듯싶다. 염소는 두 딸에 아들이 하나일 것. 그러므로 이 시에서 인간이나 염소 모두 여성의 세계가 지배적인 듯. 봄날은 대지의 모성이 강한 것으로 풍요와 다산의 기대감으로 한껏 부푼다.
봄날은 우리에게 염소와 촌수를 따져보게 한다. 시인의 어머니가 두 딸을 데리고 냉이를 캐고 염소도 새끼들 거느리고 풀을 뜯느니. 오늘은 전생과 내생도 한 뼘 차이로 가까워. 시인은 이런 평온한 세상의 한나절 맞이해 저 염소에게 가 댁의 성씨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봐야 되겠다 한다. 이렇듯 사람과 동물과 풀과 나물이 하나로 통하는 시간. 그렇게 생명의 선상은 모두 평등한 것. 그러므로 봄은 염소와 사람 촌수 가깝고 풀과 나물도 한 끗 차이일 뿐이다.
칠백만원
박형준(1966~ )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식구들 몰래 내게만
이불 속에 칠백만원을 넣어두셨다 하셨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이불 속에 꿰매두었다는 칠백만원이 생각났지
어머니는 돈을 늘 어딘가에 꿰매놓았지
대학 등록금도 속곳에 꿰매고
시골에서 올라왔지
수명이 다한 형광등 불빛이 깜빡거리는 자취방에서
어머니는 꿰맨 속곳의 실을 풀면서
제대로 된 자식이 없다고 우셨지
어머니 기일에
이젠 내가 이불에 꿰매놓은 칠백만원 얘기를
식구들에게 하며 운다네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가 이불 속에 꿰매놓은 칠백만원
내 사십 줄의 마지막에
장가 밑천으로 어머니가 숨겨놓은 내 칠백만원
시골집 장롱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는
이불 속에서 슬프게 칙칙해져갈 만원짜리 칠백 장
시인은 아직도 장가를 못 간 노총각. 어머니 기일에 어머니께서 생전에 이불 속에 꿰매놓으셨다는 칠백만원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하며 운다. 어머니는 내게만 칠백만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자식들 하나하나에게 한가지씩의 비밀을 심어놓으셨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가 이불 속에 꿰매놓은 그 칠백만원이. 어찌 어머니의 사랑을 칠백만원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내가 찾는 것은 돈 칠백만원이 아니라 어머니의 흔적 아니, 어머니 자체일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이 지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자식이 길을 떠날 때나 먼 곳에서 찾아온 친척이 돌아갈 때면 어머니 속곳에서는 여지없이 꼬깃꼬깃 접힌 종이돈이 나왔다. 이거 가지고 가다가 배고프면 뭐라도 사먹으라고, 어른을 찾아뵐 때는 절대로 빈손으로는 가지 말라고. 손 안에 꼭 꼭 쥐어주시던 사랑. 그 돈 몇 장을 쥐고서 길을 가면 그렇게 든든하던 때가 있었다,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거기 정자나무 아래 어머니는 손사래 치며 어서 가라고 어서 가라고 서 계시곤 하셨지. 이제 시인이 각시 얻어 장가를 간다고 해도 반겨주실 어머니 안 계시는데, 이불 속에서 슬프게 칙칙해져갈 만원짜리 칠백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