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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판타지/환상문학 > 외국판타지/환상소설
· ISBN : 9791188502097
· 쪽수 : 311쪽
책 소개
목차
제1장 보라색 표지의 책·7
제2장 대학 도서관에서·15
제3장 페트르진 산·31
제4장 말라스트라나 카페·45
제5장 정원·59
제6장 야간 강의·70
제7장 축제·85
제8장 포호르젤레츠에 있는 비스트로 식당·100
제9장 종탑에서·113
제10장 차가운 유리·123
제11장 마이젤 거리의 가게·132
제12장 싸움·152
제13장 카렐다리·167
제14장 뱀 집 레스토랑·176
제15장 침대보·184
제16장 가오리·197
제17장 수문에서·207
제18장 정거장에서·223
제19장 계단·238
제20장 정글·252
제21장 석조 성당·268
제22장 출발점·281
작품 해설·297
역자 소개·310
책속에서
나는 책장에 있는 높낮이가 다른 여러 책등을 따라서 내 손가락을 움직여갔다. 갑자기 내 손가락이 국민경제에 관해 프랑스어로 쓰인 두꺼운 선집과, 찢어진 책등에 『소와 말의 조산법』라는 제목이 붙은 책 사이의 어두운 틈 속으로 빠져버렸다. 그 틈 밑바닥에서 나는 매우 부드러운 책등을 만질 수 있었다. 안간힘을 다해 나는 책장 깊은 곳에서 진한 보라색 벨벳 제본의 책을 꺼냈다. 거기에는 책 제목도 저자 이름도 없었다.
나는 책을 펼쳤다. 책 페이지들은 알 수 없는 이상한 문자로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책을 뒤적였다. 창밖 눈보라를 상기시키는 책 앞뒤의 속 백지에 있는 뒤틀린 아라베스크 무늬를 잠시 동안 살펴보다가 다시 책을 덮었다. 책 한 권을 꺼낸 후 생겨난 틈새 공간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두 학술논문 자료들 사이로 다시 그 책을 쑤셔 넣었다.
나는 계속해서 책장을 따라가다가, 잠시 멈칫하다 다시 돌아와 진열된 책들 사이에서 조금 전 그 보라색 책을 반쯤 꺼낸 채 잡고 있었다. 조금 전에 한 것처럼 다시 그 책을 가지런히 되돌려 놓고 다른 책들을 살펴보는 것은, 바깥 눈보라 속으로 나가 거리를 따라 걷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쉬웠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억할 것도, 잊어버릴 것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이 가지고 온 책에 있는 글자와 똑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놀라움에 젖어 알 수 없는 글자가 있는 페이지를 넘기고 있어서 달콤한 냄새가 방안에 퍼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 글자들은 이상하게 변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글자들의 줄에서는 계속해서 그 어떤 물결이 규칙적으로 요동쳤고, 글자는 마치 누군가 규칙적으로 불어서 이글거리며 불타는 석탄처럼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고 밝아졌다가 꺼지곤 했습니다. 밝아질 때마다 저는 알 수 없는, 점증하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진동은 점점 더 빨라졌으나 곧 모든 것이 금세 꺼져버렸고, 책 본문들에는 마치 죽은 딱정벌레처럼 검은 글자들이 있었습니다. 희열의 느낌은 혐오와 공포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때 저는 깊은 포효소리를 들었습니다. 창문 바깥을 바라보니, 페트르진 산 뒤로부터 약 1킬로미터 높이의 쓰나미가 물결치며 밀려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천천히 가까워지더니 페트르진 산비탈을 무너뜨리고 동시에 전망대를 파괴했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무서운 쓰나미의 습격을 기다렸습니다. 포효소리는 계속해서 강해지다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저는 잠시 눈을 감고 이상한 죽음의 고요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눈을 뜨고 바라보았더니, 검은 물의 벽이 꼼짝도 하지 않고 창 너머 손닿을 거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창밖으로 몸을 굽혀 손가락을 차가운 물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나는 실제로 페트르진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아직도 모른다. 나는 어떤 비밀 종파를 만났던 것일까? 나는 새로운 종교의 발생을 목격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어쩌면 페트르진 지하에서 확장되기 시작해 나중에는 전 세계를 지배할지도 모른다. 그 반대로 지하 예배는 사라지는 고대 종교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던 것일까?
그 사원을 방문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프라하에 모인 외국인들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은 수세기 동안 드러나지 않은 채 우리들과 함께 살아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우리 도시에 이웃해 있는 어떤 미지의 도시의 경계선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일까? 그것은 우리들의 제도가 소비하지 못하고 버린 쓰레기로부터 자라난 도시가 아닐까? 아니면 그들이 우리보다 여기에 먼저 도착했고, 우리가 떠나도 그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우리가 거의 무관심했던 현지토박이들의 사회였을까? 그 도시의 청사진은 무엇일까? 도시 행정구역은 어떻게 나누어지고, 법률은 어떤 것이 있을까? 간선도로들, 광장들과 환하게 빛나는 궁전이 딸린 정원들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