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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서양사 > 서양중세사
· ISBN : 9791188990177
· 쪽수 : 420쪽
· 출판일 : 2018-12-31
책 소개
목차
지도
들어가는 글
1. 위기의 유럽
갈등과 분열의 11세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관계의 악화
우르바누스, 동방에서 실마리를 찾다
교황의 반격
2. 콘스탄티노플의 회복
장엄한 국제 도시 콘스탄티노플
제국의 위기
알렉시오스의 등장
젊은 황제의 새로운 통치 방식
3. 동부의 안정
알렉시오스 집권 초기의 동부 상황
투르크 용병 대장 술라이만
이이제이의 허와 실
술탄 말리크-샤와의 연대
4. 소아시아의 붕괴
뱀을 먹어본 적이 있나요?
총체적 난국
니케아를 수복하라
5. 재앙의 벼랑에서
강력한 황권 뒤에 움튼 불안의 싹
반역의 움직임이 시작되다
군인 알렉시오스의 연설
6. 동방의 구원 호소
서방을 향한 호소
예루살렘이 위태롭다
성물 외교
황제와 교황의 연대
7. 서방의 반응
발품 파는 교황
구원이라는 약속
원정 준비
누가 총지휘관인가?
원정의 시작과 제국의 지원
8. 제국의 수도를 향하여
민중 십자군
본 부대의 이동
황제의 사치스러운 환대
불안한 공존
거들먹거리는 아군을 다루는 법
9. 적과의 첫 번째 만남
첫 교전
보상과 불만
비잔티움 군대의 소아시아 진격
첫 번째 기적의 승리
황제의 서방 출신 대리인, 보두앵
안티오크에서의 고난
10. 십자군의 영혼을 위한 갈등
안티오크를 꼭 함락시켜야만 하는가?
보에몬드의 계략
정면대결을 택하다
십자군 내외부의 분열
예루살렘으로
11. 와해되는 십자군
거룩한 승리와 피의 향연
예루살렘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비잔티움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노력
12. 제1차 십자군의 후일담
영웅 보에몬드
비잔티움 공격이 실패하다
충성 맹세를 위반한 자는 누구인가?
전갈 같은 자, 알렉시오스
우르바누스 2세에 대한 서술
십자군전쟁이 제국에 가져다준 것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더 읽을거리
찾아보기
리뷰
책속에서
1장 위기의 유럽
우르바누스는 교황 자리에 올랐을 때 자신이 클레멘트 3세와 그의 후원자인 하인리히 4세 때문에 취약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의식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힘을 빌려 올 수 있는 다리를 놓아야 했다. 그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콘스탄티노플과 화해하는 것이었다. 우르바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의 긍정적 신호에 재빨리 반응했다. 우르바누스가 클레멘트 3세와 교권 투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그런 돌파구는 우르바누스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도착한 사절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비잔티움제국이 붕괴 직전에 있으므로 도움이 긴급하다는 것이었다. 우르바누스는 그 사태에 내포된 의미를 즉각 파악했다. 교회를 영구히 하나로 단합시킬 좋은 기회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북쪽인 클레르몽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2장 콘스탄티노플의 회복
동부의 여러 주들이 투르크족의 수중에 떨어지고 제국이 무릎을 꿇은 상태였으므로, 비잔티움은 제국의 사절이 피아첸차로 찾아가 우르바누스 교황에게 투르크의 위협을 막아달라고 호소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소아시아가 근 15 년 전에 투르크의 수중에 떨어졌는데, 콘스탄티노플은 왜 1095년에 들어와서야 갑자기 극적인 구원 요청을 하게 되었을까? 이 절망적인 호소와 교황의 즉각적인 반응의 타이밍은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다. 비잔티움의 호소가 전략적인 것이었다면, 우르바누스의 반응은 이기심에다 서방 교회의 라이벌들을 제압하고 단독 교황으로 우뚝 서려는 욕망이 가미된 것이었다. 따라서 제1차 십자군전쟁의 핵심에는, 소아시아발 위기와 현실정치라는 복잡한 스토리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을 촉발시킨 불꽃의 배후에는 만지케르트의 참사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비잔티움제국의 통치자로 등장한 젊은 청년이 있었으니, 곧 알렉시오스 콤네노스였다.
7장 서방의 반응
기독교인의 고통, 정신적 보상, 예루살렘이라는 목적지 등을 한데 뒤섞은 수사적 칵테일은 사람들을 도취시켰다. 우르바누스는 또 다른 강력한 수단도 갖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면서 방돔의 성 삼위일체 교회와 마르무티에와 무아삭의 수도원 교회 등 많은 교회들을 축성했다. 교회의 신자들은 성스러운 십자가의 조각을 선물로 받았다. 사실 십자가의 조각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보관되어왔고 4세기(이 당시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 중요한 유물을 로마의 세소리아노 왕궁에 하사했다)부터 제국의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성스러운 십자가는 비잔티움이 국제 외교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소중한 수단이었다. 우르바누스가 교황청 보물 창고에 들어 있던 조각들을 나누어 주었다고 추정해볼 순 있으나, 그보다는 알렉시오스가 콘스탄티노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 유물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