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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91188990429
· 쪽수 : 524쪽
· 출판일 : 2019-09-16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한국 현대사의 그늘 ‘삼순이’
1부 식모
머리말: 생명의 어미에서 ‘하녀’로
1. 조선어멈을 아시나요?
일본 가정을 선호한 식모들 | 저주받은 식모살이 | 염상섭과 김동인의 불만 | 아이를 돌본 아이, 아이보개
2. 식모 전성시대
전쟁과 식모 | 고향을 떠난 순이 | 서울역 광장의 함정 | 식모를 둔 판자촌
* 남성 식모
3. 하녀의 다른 이름, 식모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한다면 | 시집갈 때 돈 줄게 | 감히 택시를 탄 식모 | 어린이 식모 | 집주인의 폭행 | 살인식모·유괴식모·악당식모 | ‘왈순아지매’에서 ‘봉순이 언니’까지
4. 그 많던 식모는 어디 갔나
주부들의 항변 | 식모, 주부들 타락의 주범으로 몰리다 | 시간제 식모의 출현
* 식모 자리를 옮기지 않고도 월급을 올리는 법
2부 버스안내양
머리말: 영화 〈도시로 간 처녀〉의 주인공들
1. 로맨스를 흩뿌리던 ‘뻐스걸’
집채만 한 차, 경성을 달리다 | 담 밖으로 나온 규중처녀 | 애간장 녹는 총각들 | 차마 말하지 못한 속사정
2. 남성 차장
교통지옥의 시대 | 차장은 ‘갑’, 승객은 ‘을’
* 열일곱에 시작한 남차장
3. 대중교통의 선두 주자로 나선 버스
쿠데타 정권의 혁명적 조치 | 청량리-동대문, 303호 마지막 전차 | 안내양을 퇴장시킨 ‘원맨버스’
* 이런 손님 저런 손님
4. “오라잇, 스톱!”
명랑과 친절을 위해 여성으로 | 하루 18시간 근무 | 시골 출신을 선호한 이유 | 버스안내양과 박정희 대통령 | 공포의 개문발차 사고 | ‘싸가지 없는’ 안내양들 | 억순이와 돌계집의 경계 | 야박한 여감독과 소극적인 노동조합
5.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
알몸 수색과 알몸 농성 | 기상천외한 삥땅 수법 | 삥땅 방지 대책
* 나의 버스안내양 시절(인터뷰)
3부 여공
머리말: 공장은 처녀 신세 망치는 곳
1. 그대 이름은 ‘산업역군’
국가에 소속된 여공 | 나비가 된 YH무역 여공들 | 대통령의 딸과 여공 | 주경야독 시스템
* 최초 고공농성 노동자 강주룡
2. 나는야, 뺑이 치는 공순이
눈물 젖은 보름달 빵 | 또 하나의 해방구, 여공 기숙사 | 구로공단 벌집 | 성냥공장 아가씨와 공장의 불빛
* 여공과 남자 대학생
3. 공순이들의 반란
1970년대 노동운동의 주역 | 여공들의 친구 도시산업선교회 |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 | 노동운동의 신화, 원풍모방
4. “망할 놈의 비정규직 세상”
달라진 노동운동의 주축 | “노동운동 그러는 거 아입니더” | 12년 만에 마침표를 찍은 기륭전자 사태
에필로그
참고문헌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프롤로그〉
그렇지만 이 책의 독자, 특히 왕년에 ‘삼순이’였던 독자들에게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과연 삼순이라는 비하 표현이 합당한가?’라는 문제에 봉착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때 가장 고단했던 그들을 위로는 못 해줄망정 비하 표현을 해야 하는지, 마침표를 찍으면서까지 고민했다. 하지만 시대 상황에 충실하기로 결단 내렸음을 양해 바란다. 본인의 경험과 다르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굳이 변명하자면 각자 처한 환경이 천차만별이라 ‘최대공약수’를 뽑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알량하지만 필자의 인사를 받아주시길 간청한다.
“고맙습니다.”
〈에필로그〉
식모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 버스안내양은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반, 여공은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생활 전선에서 맹활약했다. 대략 20년 간격으로 흥망성쇠를 보여주는데, 이는 삼순이가 시대적 산물이라는 증거다. 그렇다면 이름을 달리한 삼순이가 지금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할 거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실제로 그렇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있다. (…) 미래의 삼순이는 누구일까?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는 가늠할 수 없지만, 누가 되었든 그들을 맞이할 우리의 자세에 이 책이 참고가 되길 바란다.
1부 2장 〈식모 전성시대〉
전 가구의 30퍼센트 이상이 식모를 두는 현상은 선진국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웬만한 중산층도 인건비 때문에 엄두를 못 내는데 당시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인 한국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수학 문제의 정답처럼 명확하다. 식모들의 인건비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식구 중 한 입이라도 덜고,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는 구직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은 달리 갈 데가 없었다. 고용주들이 우위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더해 어린이들까지 이 대열에 합류했다. 작은아버지 손에 이끌려 열세 살에 식모살이를 한 최옥자 씨의 사례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피해가 어느 정도 사라진 후에도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구걸하듯 사정하니 인건비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서민들도 식모를 둘 수 있었다.
(…) 상황이 이러니 식모를 둘 수 있는 형편인데도 두지 않으면 ‘알뜰 주부’보다는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었다. 주부에게 식모는 없어서는 안 되는 가정필수품 같았고, 식모가 없는 주부는 그들 사이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옛 친구 숙이가 왔다. 손꼽아보면 6년 만에 만남이었다. 그리 좋았던 때가 전설처럼 흘러간 지금 우린 서로 너무 많이 변했다. 결혼을 했고 또 귀여운 아기엄마가 됐으니까. 무엇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기쁨과 당황의 순간이었다. 난 따끈한 차라도 마시며 서로 헤어졌던 동안의 얘기를 나누어보려고 찻상을 숙이 앞에 놓았을 때 “이거 국산 홍차로구나. 국산은 맛이 없어.” 찻잔을 거들떠보지 않는 숙이.
“난 네가 왜 동창들의 모임에 늘 빠지나 했더니 식모가 없어 그랬구나.” 싸늘하게 식어가는 찻잔을 앞에 놓고 어떤 조소가 담긴 듯한 단어들이 거침없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대접해준 한 잔의 차가 그리도 못 마실 정도로 향기가 없었고 식모 없이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무심히 표현한 말이라면 그 표현방법이 내 마음에 너무나 큰 저항감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왜 몰랐을까.
- 《경향신문》 1972년 12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