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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9171209
· 쪽수 : 424쪽
· 출판일 : 2019-07-19
책 소개
목차
내 혀는 투명해
병원
호각 소리
309.8킬로미터
말 없는 인형들
바람도 때론 슬프다
검은 양복
鐵塔철탑
決心결심
자유의 밧줄
白馬백마의 눈
혼돈이론
저자소개
책속에서
“괜찮아. 원무과에선 그걸 따로 적어놓질 않아. 그건 적출물 수거원에게 넘기는 거야. 아마 지금쯤이면 화장터의 불가마에서 잿더미가 되어버렸겠지. 잔소리말고 어서 차트나 고치게. 정 불안하면 아침절에 B―4호실 앞에서 죽치다가 적출물 수거원을 만나 보게나. 대충 수작을 붙여서 어제의 명세를 뽑아내게. 만약에 그가 태우지 않은 채 가지고 있다면 말야.”
종하의 손바닥 위에 연구실 열쇠를 던져놓은 과장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는지 급히 처치실을 빠져나갔다. 종하는 한동안을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할 뿐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도 생각나지 않았다. 갑자기 종하는 그의 내부로부터 올라오는 양심의 소리에 의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양심을 느낀다는 것은 곧 괴로움의 시작이었다. 양심은 언제나 마음의 가장 약한 곳을 뚫고 나왔다. 그 양심은 벅찬 괴로움을 동반했으며 심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아! 이것 또한 경험이 부족한 의사가 겪어야 하는 고독의 일종일까? 의사가 느끼는 고독은 이렇듯 비열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강국이는 5년 전에 심한 병으로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는데 그가 죽자 갑자기 서너 명의 의사들과 목사들이 몰려오더니 그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날 강국이가 죽자마자 그의 콩팥을 도려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식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사실을 안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이틀간이나 밥도 안 먹고 누워 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꼰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강국이는 어차피 죽은 것이지. 그런데 자기 콩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었기 때문에 그 애는 영영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된 거야.”
그날 나는 꼰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끼치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혹시 지금 소야가 또다시 그렇게 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내 몸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내 모가지가 방문의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두 팔이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뿔싸. 또다시 나는 하늘을 운전하게 되는가 보았다. 도대체 내 몸은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조금이라도 심각해지기만 하면 마치 하늘을 운전하듯 허공을 향해 팔을 빙빙 돌려야 하는 것인가.
사람에게는 누구나 예감이 있게 마련이지만 내 자신이 그런 예감을 느껴 보기는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처럼 그 예감은 불시에 나에게 찾아들었다. 회사 뒷문 바로 맞은편에 제법 반반한 양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 나는 문득 어머니가 숨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 야릇한 희열을 느끼며 그 자리에 덜컥 걸음을 멈춰 섰다.
비록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없으리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며 슬픔과 비통함보다 희열을 먼저 느꼈다는 굴욕적인 비정함이 탄로 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하던 일이었으나 곰곰 생각해 본 결과 어머니는 우리 때문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며 또한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이란 잔인하리만치 그 형을 집행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우리’란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태어난 여섯 남매와 그들의 아내, 혹은 남편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어찌 보면 유독 나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비록 온몸에 비닐관이 꽂혀 있고 칼자국이 무성하게 나 있지만 지금처럼이라도 살아 계실 수 있도록 애썼던 장본인이 바로 나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