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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살다

춤을 살다

(솔향의 제주춤 60년)

김희숙 (지은이)
  |  
황금알
2019-12-07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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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살다

책 정보

· 제목 : 춤을 살다 (솔향의 제주춤 60년)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9205522
· 쪽수 : 264쪽

책 소개

솔향 김희숙의 춤인생 60년을 추적한 춤에세이집. 솔향과의 속 갚은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과 춤의 여정을 추적하여, 춤과 더불어 살아온 생애를 자전적 회고담으로 풀어낸다.

목차

머리말 김희숙•028
추천사 조흥동•030
시 김광렬·김수열•032

제1마당 솔향의 춤꾼 인생 60년 (김희숙 · 고미선)
프롤로그•038
춤의 길에 들어서다•043
안무자의 길을 걷다•073
예술단을 떠난 뒤•093
암투병기•102
공연 이야기•113
나의 춤•134
아버지의 추억•148

*별첨
제주 민속무용의 개척자, 송근우•156
주요 공연 작품 목록•162

제2마당 제주춤 60년
김동현 섬, 춤을 품다•170

제3마당 제주춤의 내면세계
김병택 제주 민속무용 대본의 경향론•190

제4마당 솔향에 대한 추억
김택근 무용인 김희숙과의 인연!•232
현행복 무용가 김희숙의 예술적 헌신•237
강진형 선생님, 우리 솔향 선생님•252

편집자의 말 김석희•256

저자소개

김희숙 (지은이)    정보 더보기
솔향 김희숙(率向 金姬淑)은 1955년 2월 23일 제주시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처음 무대에 올라 춤을 추었다. 제주여자중고 시절 제주춤의 개척자인 송근우 선생에게 춤을 제대로 배웠으며,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무용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제주에서 무용학원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1990년에 제주도립예술단 창단에 참여하여 상임 안무장을 맡은 이후 송근우 선생의 민속춤(해녀춤·물허벅춤)을 무대 공연물로 개발하였고, 굿판을 찾아다니며 큰심방들에게 익힌 무속춤(굿춤)을 무용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그 후 민속춤과 무속춤을 종합하고 뛰어넘는 진혼무(넋풀이춤)를 창안하여, 춤꾼의 본능으로 직접 춤사위를 펼쳤다. 이 책은 춤꾼으로 살아온 인생 60년을 맞아 그 기념으로 펴내는 것이다.
펼치기

책속에서

제1마당
솔향의 춤꾼 인생 60년
김희숙 구술·고미선 정리

프롤로그

거실 한쪽 벽면에 걸린 사진 하나가 유독 정겹다. 액자에 앉은 먼지를 닦아내며 사진 속의 나에게 나직이 말을 건넨다. 그래, 쉽지 않았지. 환갑하고도 다섯 해, 그 긴 삶의 고비마다 참고 견디며 나름 잘 살아왔어. 그렇게 다독이는 내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게 느껴진다.
사진 속에는 춤사위를 펼친 손짓이 머리 위로 올라가 있다. 비에 젖은 바닥이 미끄러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펼친 춤동작. 몸에 밴 손짓인데도 왠지 느낌이 다르다. 조금은 어둡다. 그날 오후의 날씨가 흑백으로 잡힌 사진 그대로였다. 사진작가도 아닌 어느 아마추어가 찍어서 나에게 전해준 작품치고는 수준급이다. 그래서 저 사진을 더 아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꾸밈없는 표정만큼이나, 그 동작을 포착한 시선에도 꾸밈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의 춤, 거기에 서린 내 삶의 본체가 속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1994년 7월, 제주시 탑동 광장의 야외 공연장에서 펼쳐진 ‘한여름 밤의 해변축제’. 이번에 처음 열린 축제의 개막 행사였다. 나는 당시 한국무용협회 제주도지부장을 맡고 있어서, 회원들과 함께 이 행사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악천후 때문에 행사가 취소될 판이었다. 몰아치는 비바람이 태풍급이었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객석은 텅 비어 있었다.
사실 나의 출연은 원래 예정에 없던 순서였기에, 춤을 추기가 어려우면 그만두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닥치자 그럴 수는 없었다. 지부장으로서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지만, 그게 어쩌면 공연에 임하는 춤꾼의 운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느 단원의 무용복을 빌려 입고 허리끈을 질끈 동여맸다. 하얀 치맛자락이 세찬 바람에 휘날려 허리를 몇 겹으로 휘감았다. 머리카락도 바람에 날려 얼굴을 가렸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정에 없었기에 준비된 음악도 없어, 그야말로 무반주로 나선 춤이었다. 비바람 몰아치는 무대로 나서자 회원들도 뒤따라 나섰고, 연이어 군무가 펼쳐졌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길 건너 호텔의 투숙객들이었다. 객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다 을씨년스러운 공연장 풍경을 발견하고는 우산을 들고 내려온 것이다. 그들은 무대 주위에 스크럼을 짠 것처럼 늘어서서 우산으로 바람을 막아주었다.
나의 춤사위도 빗속에서 자연(그토록 원망스러웠던)과 하나가 되어 자유분방하게 펼쳐졌다. 아마도 영혼으로 추는 춤의 한 자락이 아닐까 싶었다. 어느덧 객석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그들의 환호와 뜨거운 박수갈채 속에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그날의 숨 가쁜 순간을 붙잡은 추억의 사진에는 나의 춤꾼 인생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 사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내 집을 찾아오는 이들의 눈에도 근사해 보이는지, 감탄의 한마디쯤 빼놓지 않고 한다. 어느 작가가 찍어주었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가만히 미소 짓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 사진은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어서, 거실의 텔레비전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텔레비전을 켤 때마다 내 시선을 우선 사로잡는다. 저 사진 속의 비에 젖은 무용복 차림을 보면서, 빗속의 투혼을 뿜어냈던 나를 기억한다.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사진 속의 내

가 금세라도 액자 밖으로 걸어 나올 듯하다. 그리고 사진 속의 내가 나를 또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인생은 흔히 여행에 비유된다. 나의 춤꾼 인생 60년이 바로 여행이었다. 나이를 먹는 줄도 모르고 육십 중반을 넘어서고 보니 춤꾼으로 살아온 이력도 환갑이 되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시작한 춤이 인생의 오르막 내리막을 거치며 쉼 없이 내달려온 여행길이었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제자나 동료들과 더불어 무대에 오르면 그곳이 여행지였다. 하지만 귀찮다고 주저앉거나 건너뛰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견디며 춤 속에 파묻혀 살아왔다. 돌아보면 슬픔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다. 아픔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다. 누구의 인생인들 그 안에 희로애락이 없을까마는, 하필이면 춤을 붙들고 거기에 매달리기도 하고 거기에 기대기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이니, 여느 인생과는 다른 구석도 없지 않을 터이다. 그런 인생의 굽이굽이에 묻어 있는 나의 자취를 더듬어보려고 한다.
춤의 길에 들어서다

입문
돌아보면, 지나온 저 길에 아득한 세월이 놓여 있다. 갖가지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과거의 풍경들 속에서 그때의 장면은 놀랍게도 기억에 선명하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무용학원 문턱을 넘은 것이 네 살 때였고, 그 이듬해인 1959년 가을에는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올해가 2019년이니, 그야말로 춤꾼 인생 60년을 걸어온 셈이다.
당시 제주에는 제대로 된 무용학원이나 체계적으로 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없었다. 안 그래도 삶이 고단하고 생활이 어렵던 시절, 거기에 문화나 예술이 척박한 제주섬에서 무용에 대한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 환경이었다.
목포에서 무용가인 김우숙(어머니의 기억에 따른 이름이다) 선생님이 요양차 제주에 와서 산지천 인근의 명승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그분이 제주에 머무는 동안 틈틈이 시간 맞춰 찾아가 호텔 내 연회장에서 춤을 배웠다. 춤을 배웠다기보다 춤 동작의 기초쯤 몸에 익히는 연습을 한 정도였다.
반년쯤 지나 선생님이 제주를 떠날 때가 되자, 그분에게 춤을 배운 학생들의 무용 발표회가 칠성통에 있는 중앙극장 무대에서 열렸다. 고별 공연인 셈이었다. 나도 부모님 손에 이끌려가서, 순서 하나를 맡아 무대에 올랐다. 동갑내기 친구와 함께 먼저 <쌍둥이 춤>을 추었는데, 작은 몸집에 귀여운 동작으로 춤사위를 펼쳐 박수갈채를 받았다. 다음 순서로 나 혼자 무대에 올라 <애기와 인형> 춤을 추게 되었는데, 어린 나이에 쑥스럽고 겁도 났는지, 춤을 추다가 앞을 바라보니 엄마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 순간 멍해지면서 동작이 뒤엉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만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던 기억이 새롭다.
어쨌거나 부모님은 그 후에도 육지에서 유명한 무용인이 제주에 왔다는 소문만 들으면 꼭 찾아가 춤을 배우게 했다. 이처럼 든든한 부모님의 후원이 나를 춤꾼으로 만든 것이다.
어린 시절, 제주시내 동양극장 맞은편 건물 2층에 ‘옥진남 무용학원’이 있었다. 그곳에서 삼북과 창고춤과 발레를 배웠는데, 창가에 세워진 철봉에 발을 올려놓으며 기본 동작을 연습했다. 무용을 배우려면 기초 수업으로 발레를 해야 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의상과 슈즈를 신으면, 그런 무용복 자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발레 연습 순서가 끝나면, 이번에는 정면과 좌우에 사각형 구조로 북을 세워놓고 북을 치면서 허리를 뒤로 제치는 연습을 했다. 몸의 유연성을 기르는 기초 연습이 되지 않으면 뒤로 꽈당 넘어지기도 숱하게 했다.

내가 어려서 배운 한국무용은 정통 북춤에서 시작되었는데, 북소리는 일정한 장단과 가락이 없어도 힘차고 멋있다. 관객의 박수 소리에 나는 점점 북춤에 빠져들었다.
학창 시절
나는 1955년 2월 23일, 제주시내 칠성통에서 태어났다. 2남 3녀 중 둘째였다. 아버지(김윤옥)는 조천읍 함덕리 출신이고, 어머니(고춘림)는 화북 출신이다. 아버지는 당시 『제주신보』 기자였다. 어머니는 어릴 때 부모님(그러니까 나의 외조부모)과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까지 마치고 해방 뒤에 귀환했다. 우체국에 근무하다가, 취재를 하러 간 아버지와 만나 연애 끝에 결혼했다고 한다.
내가 다섯 살 무렵 동문시장 안쪽의 남수각 동네로 이사를 했는데, 크게 잘 살지는 않았지만 당시 형편에서 보면 꽤 유복한 편이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예술가 기질을 타고난 분이어서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었고, 집에는 기타와 풍금까지 있었다. 내가 무용에 빠져든 것도 그런 기질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1961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원래는 북교에 입학했는데, 학군 조정 때문에 2학기 때 동교로 전학했다. 여기서 문정희 선생님을 만난 게 나의 춤 인생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선생님은 제주측후소장의 따님이어서, 측후소 관사 거실에서 여러 장르의 춤을 가르쳤는데, 발레와 꼭두각시 춤, 인도 춤 등 어릴 적에는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춤을 배우며 즐겁고 신도 났다.
동초등학교 6학년 때는 서울에서 열린 ‘산토끼 무용제’에 참가해서 우수상을 받았다. 당시는 무용 상이 흔하지 않은 때였다. 조회 시간에 혼자 운동장 교단 앞으로 나아가 교장 선생님이 목에 걸어주는 메달을 받을 때는 우쭐한 기분이 들기보다 솔직히 진땀이 났다.
1967년에 제주여자중학교에 들어갔다. 문정희 선생님이 제주여중 출신이어서, 그분의 권유에 힘입어 무용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당시는 전형을 치르던 때여서, ‘산토끼 무용제’에서 받은 상장을 제출하고 실기 테스트를 거쳤다. 테스트는 <소녀의 기도> 음악에 맞춰 발레복 차림으로 했는데, 그때 사진을 보니 발레복 위에 스웨터를 걸친 모습이 좀 우습기도 하다. 2월 초였는데도 학교에는 난방시설이 없어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몹시 추웠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제주여자중학교는 지금의 칼호텔 자리에 있었다. 무용부는 대회가 가까워져 오면 한두 달은 오후와 야간에 주로 연습했다. 선배들과 합숙하면서 동고동락했다. 공연 날이 잡히면 각자 쌀과 이불을 들고 가서, 오전 수업도 빠지고 온종일 무용부 연습실에서 밤늦게까지 지냈다.
그때 무용을 담당했던 분이 송근우 선생님이었는데, 기본기가 되어 있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로 돌려보냈다. 무용 특기생 외에도 입학 후에 지원자를 뽑아서 무용부원을 채웠는데, 선발 때가 되면 선생님은 심사에도 엄격했다. 체육 시간이 되면 무용부 학생들은 운동장 대신 연습실로 향했는데, 이런 특전(?)은 송근우 선생님이 체육 선생님과 상의한 결과였겠지만, 체육 시간에 운동을 하다가 몸을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이를 염려해서 배려해준 것이었다.
무용부는 규율부에서 점검하는 모발 검사에도 제외했다. 무용 공연 때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무용부원은 귀밑 3센티 단발머리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갈래머리를 땋았다. 두 갈래로 땋은 머리 타래가 어깨 너머로 찰랑대는 모습은 학교 울타리를 넘어 제주시내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제주여중고 시절에 송근우 선생님을 만나면서 나의 춤 인생이 새롭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었다. 일본에서 현대 무용을 배운 선생님은 제주 무용계에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선생님의 하얀 무용복 바지는 세탁소에서 꼿꼿하게 다린 듯 정갈하여 파리조차 미끄러질 듯하였다. 상하의를 하루도 흐트러짐 없이 차려입으셨던 모습은 춤추는 사람의 반듯한 몸가짐으로 내 마음에 인상 깊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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