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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문학으로, 문학에서 삶으로

삶에서 문학으로, 문학에서 삶으로

(장경렬 평론집)

장경렬 (지은이)
  |  
황금알
2020-01-17
  |  
25,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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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문학으로, 문학에서 삶으로

책 정보

· 제목 : 삶에서 문학으로, 문학에서 삶으로 (장경렬 평론집)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문학의 이해 > 한국문학론 > 한국비평론
· ISBN : 9791189205577
· 쪽수 : 336쪽

책 소개

장경렬 평론집. 이번 평론집은 4부로 구성하였다. 제1부는 문학도로서 내가 우리 시대와 우리 사회의 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 가운데 한 사람의 자격으로 수행해 온 '문학 비평' 또는 '평론' 행위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

4 머리말
‘문학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제1부 문학 비평의 정도를 찾아서
18 문학 비평과 나
27 자아 성찰로서의 문학 비평과 비평의 소임
39 평론의 어려움과 평론가의 불안감
― 오디오 기기 평론과 문학 평론 사이에서

제2부 시어의 미로에서 삶의 의미를 헤아리며
56 고향을 향한 시인의 상념, 그 깊이를 짚어 보며
― 김상옥의 시 「참파노의 노래」·「안개」·「사향」과 시인의 고향 생각
82 일상의 삶이 살아 숨 쉬는 시 세계, 그 안을 거닐며
― 김종해의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과 시인의 다짐
98 삶에 대한 작지만 소중한 깨달음, 그 순간을 엿보며
― 안영희의 시집 『어쩌자고 제비꽃』과 삶을 향한 시인의 시선
123 시인의 시선과 상상력, 그것이 함의하는 바에 기대어
― 이달균의 시 「장미」와 「복분자」, 또는 드러내기와 뒤집기
136 “장미 이데아”를 향한 시인의 시선을 따라서
― 오주리의 시집 『장미릉』과 다의적 의미의 시 세계

제3부 삶을 향한 성찰의 눈길을 따라서
162 인간 사이의 관계맺음에 대한 탐구, 그 현장에서
― 최일옥의 소설집 『그날 엄마는 죽고 싶었다』와 ‘극’으로서의 소설
192 환상문학의 진경(眞境), 그 안에서
― 윤영수의 소설 『숨은 골짜기의 단풍나무 한 그루』와 나무가 전하는 이야기
228 죽음의 유혹과 죽음에의 저항, 그 안과 밖에서
― 이응준의 연작소설 『소년을 위한 사랑의 해석』과 ‘죽음 충동’의 의미
253 소설 쓰기와 거짓 이야기 만들기, 그 경계에서
― 권정현의 단편소설 「옴, 바라마타리아-종교의 탄생」과 언어의 타락
266 강물의 푸름과 인간의 슬픔이 함께하는 곳에서
― 이정의 소설 『압록강 블루』와 분단의 현실

제4부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형상화 사이에서
286 노근리 사건의 문학적 형상화, 그 사례와 마주하여
― 정은용의 체험 기록에서 필립스의 『락과 터마잇』과 이현수의 『나흘』에 이르기까지
313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 그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며
― 백시종의 소설 『강치』와 문학의 역할

저자소개

장경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스틴 소재 텍사스대학교 영문과 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학교 영문과의 교수직을 거쳐,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번역서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잠든 모습을 보 며』, 『야자열매술꾼』, 『아픔의 기록』,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젊은 예술가의 초상』, 『라일라』, 『학제적 학문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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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제1부
문학 비평의 정도를 찾아서

문학 비평과 나


지난 2017년 5월 20일 학교 연구실에서 밀린 원고를 쓰는 중이었다. 써지지 않는 글을 쓰느라 고군분투하는 나의 귀로 언뜻 익숙한 음악의 선율이 스쳤다. 나지막하게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선율은 바흐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가운데 하나의 첫 소절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이는 지난 198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전반까지 오디오 기기의 성능을 가늠하는 평론 활동을 하던 시절에 즐겨 찾던 곡이다. 시청 중인 오디오 기기가 음원(音原)의 위치를 얼마나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살리고 있는가를, 고음 영역의 음을 얼마나 선명하게 또한 음악적으로 재현해 내는가를 가늠하고자 할 때 즐겨 찾던 선율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내가 곁에 둔 CD 음반은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나온 슐로모 민츠(Schlomo Mintz)의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바흐의 소나타와 파르티타>였다. 언뜻 감지한 바로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내 귀에 익숙한 슐로모 민츠의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 이어진 진행자의 설명에 의하면, 스쳐 듣다가 귀를 모았던 것은 헨릭 셰링(Henryk Szeryng)의 연주였다. 내가 이처럼 셰링의 연주와 만나게 된 것은 KBS FM 제1방송의 ‘명연주 명음반’이라는 프로그램 덕택이었다.
비록 연주의 분위기가 다르긴 했지만, 오랜만에 귀 기울이는 바흐의 바이올린 선율이 나에게 갖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우선 내가 소장하고 있는 CD 음반은 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학생 시절 54달러를 지불하고 구매한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정확하게 말해, 내가 구매한 것이 아니라 매장에서 누군가가 구매해서 나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누가 무슨 경위로?
사연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텍사스대학교 영문학과에서 유학생으로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나는 특기를 살리되 취미 삼아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주변 사람들의 값나가는 전자 기기가 고장 나면 이를 수리해 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대학교의 공대 전자공학과에 다니는 한국인 학생이 자신의 오디오 앰프가 동작을 멈췄다며, 수리를 부탁해 왔다. 우선 가장 흔하게 말썽을 일으키는 앰프 출력단의 트랜지스터를 점검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문제가 있었다. 출력단의 파워 트랜지스터 4개가 모두 망가져 있었다. 약 20여 달러에 부품을 사다가 교체하자 앰프가 다시 정상으로 동작했다. 그런데 며칠 잘 작동하다가 다시 동작을 멈추는 것이 아닌가.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출력단의 트랜지스터를 망가뜨리는 원인이 회로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이다. 이를 찾기 위해 기기 내부를 점검하려 했지만, 온갖 보정 장치로 인해 회로가 너무 복잡하여 작업이 쉽지 않았다. 보통 웬만한 전자 기기의 경우 머릿속으로 회로를 그려 가며 수리를 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리를 부탁한 친구의 학과가 전자공학과이니만큼 그가 쉽게 회로도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며칠이 걸리리라는 예상을 뛰어넘어 바로 다음날 어딘가에서 이를 구해 왔다.
엄청나게 복잡한 회로도를 펼쳐 놓고 이를 참조해 가며 기기의 회로를 따라 전압을 측정해 보았으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풀리지 않는 까다로운 수수께끼와 만난 셈이었다. 그런 수수께끼를 풀 듯 오랜 시간 씨름한 끝에 마침내 고장의 원인을 찾아 낼 수 있었는데, 말썽을 일으킨 것은 놀랍게도 중심 회로 변두리의 보정 장치에 있는 작디작은 콘덴서였다. 전력단의 전해 콘덴서를 제외하고 좀처럼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콘덴서인데, 이 조그만 부품의 내부에서 합선이 일어나 회로 전체에 미약하나마 과전압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불과 몇 센트밖에 하지 않는 이 부품을 구입하여 납땜으로 교체함으로써 앰프의 수리를 완료할 수 있었다.
앰프 수리가 끝나자 수리를 맡겼던 친구가 수리비를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어떤 전자 기기 수리를 하더라도 맥주나 CD 음반으로 수리비를 대신했다. 취미 생활을 돈으로 훼손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다. 내 입장을 설명하고 그를 설득하여 찾은 곳이 음반 가게였는데, 그곳에서 내가 수리비 대신에 선택한 것이 슐로모 민츠의 바이올린 독주곡 음반이었던 것이다.
문학 비평에 대한 나의 생각과 입장을 피력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처럼 엉뚱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나에게 문학 비평이란 무엇인가’를 자기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자 할 때 그보다 더 시사적인 일화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분석 대상인 문학 작품에 부여할 수 있는 전체적으로 일관된 의미망을 모색한 다음 이 같은 의미망의 일관성을 깨뜨리는 요소가 있음을 발견하고는 이를 놓고 생각에 잠기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전자 회로를 다루듯 문학 작품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갑작스럽게 머리를 스쳤다. 앞선 일화가 증명하듯, 전자공학과 학생의 앰프를 수리해 줄 정도로 나는 전자기기 수리나 조립에 기량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에 익숙해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혹시 나는 나도 모르게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을 전자 기기를 점검하고 수리하거나 조립하는 일처럼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 문학도의 태도와 마음보다는 기술자의 태도와 마음이 문학 작품에 대한 나의 분석과 평가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때문에, 나의 문학 비평은 문학적 감수성에 호소하는 유연한 것이 아니라 기술자 특유의 결벽증이 앞서는 딱딱하고 메마른 것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자 기기의 경우, 단 하나의 부품에 결함이 있거나 배선 하나만을 잘못 연결해도 기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혹시 나는 그러한 전자 기기를 수리하거나 조립할 때의 태도와 마음으로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문학적 호소력이나 감성적 깊이가 결여된 글을 문학 비평이라는 허명 아래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전자 기기에 매혹되어 있었다.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초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그랬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 나이에 어쩌다 구한 전자 기기 부품 하나가 나에게 주는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이었다. 심지어 잠자리에 들 때도 나는 그 부품을 멀리할 수 없었다. 이를 배게 옆에 놓고 바라보면서 미래에 전자공학자나 물리학자가 되어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전자 회로와 관련 이론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이 되어 물리반 활동을 하면서부터이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잘 이해되지도 않는 온갖 관련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간단한 회로의 라디오나 전자 장치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일에 몰두해 있을 때는 학교 공부를 할 때와는 달리 새벽까지 깨어 있거나 밤을 새워도 졸음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고등학교 2학년에 진급하면서 이과가 아닌 문과를 택했으며, 대학 진학을 앞두고 영문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당시 가르침을 주시던 훌륭한 선생님들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이는 오랜 생각 끝에 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내 젊음과 삶을 바쳐야 할 것은 인간의 삶과 세계를 다루는 문학―문학 가운데서도 폭과 깊이가 월등할 것으로 짐작되는 영문학―을 공부하는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전자 기기와 전자 회로에 대한 관심과 흥미는 어찌할 것인가. 이는 살아가는 동안 내내 즐길 취미의 영역에 남겨 두기로 하자.
아무튼, 대학을 들어와 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내 마음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나를 갈등케 하던 원론적 의문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었다. 즉, 훌륭한 문학 작품과 그렇지 않은 문학 작품을 나누는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그와 같은 기준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혹시 문학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그런 기준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문학에서 객관적인 가치 판단이라는 것이 가능한지? 그럴 수 있다면, 어찌 그처럼 판단이 경우마다 또한 사람마다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은 이뿐이 아니었다. 문학이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삶의 보편적인 진리? 아니면, 인간의 삶과 세계에 내재된 본질적인 의미? 설사 이 가운데 하나라고 하자. 그렇다면, 무엇이 보편적인 진리이고 무엇이 본질적인 의미인가. 이 같은 진리나 의미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판단 기준의 존재 여부나 객관성을 묻는 일, 또는 진리나 의미의 실재 여부를 따지는 일, 내가 이 같은 일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혹시 전자 회로를 들여다보는 태도와 마음으로 문학을 바라보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 전자 회로는 보이지 않지만 전기라는 ‘실체’에 의해 작동한다. 바로 이 전기에 해당하는 것이 문학에서는 무엇인가. 문학에 대한 이 같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도 계속 영문학을 택했다. 영문학을 통해 문학―즉, 가치 판단과 판단 기준의 문제든, 보편적 진리나 의미의 문제든, 이와 관련하여 무언가 ‘실체’가 문학의 언어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신비화하는 문학―의 정체를 추적하는 일을 아직은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석사 과정을 마칠 때 영국의 문학 이론가인 새뮤얼 테일러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상상력 이론에 관해 학위 논문을 썼지만, 그것으로 문학을 ‘탈신비화’할 수는 없었다. 문학의 ‘아우라’를 있는 그대로 살리되 문학을 ‘탈신비화’할 수는 없을까. 다시 말해, 살해하지 않고 해부할 수는 없을까. 내가 텍사스대학교 영문과로 유학을 떠날 때 목표한 바는 그것이었다. 요컨대, 문학 작품의 문학성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되 문학 비평의 두 과제인 분석과 평가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다행히도, 유학 생활 동안 문학 이론과 비평 이론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문학 비평의 온갖 문제에 관해 탁월하고 명쾌한 견해를 지닌 분을 지도교수로 모시게 되었고, 그 분의 도움에 힘입어 문학 및 문학 이론과 비평 이론에 대해 폭넓게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학부생 시절의 의문이 풀렸는가. 아니다, 의문은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전하다. 사실 이 같은 의문은 영원한 것이고 영원히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아가, 문학이 문학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이처럼 영원히 해결이 불가능한 그 무언가를 보듬어 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인간의 삶에 내재된 수수께끼에는 궁극의 답이 없지만 이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일을 멈추는 순간에 삶은 삶으로서의 소중한 의미를 잃는 것처럼 문학도 도달 불가능한 답을 향한 추구를 멈추는 순간에 문학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리라는 것, 문학의 숲을 헤매며 답을 찾는 문학도가 숲 속에서 긁히고 찢기고 넘어지는 바람에 결국에는 그에게 남는 것이 상처뿐이라도 그 숲을 헤매는 일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러는 가운데 얻은 상처가 곧 영광일 수 있다는 것,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해도 이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영광이라는 것, 그것이 내가 얻은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이 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텍사스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문학 작품 이외에 다양한 문학 이론과 문학 비평 이론 및 철학과 논리학 관련 서적과 만날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많은 시간 공을 들여 읽은 것은 폴 드 만(Paul de Man)의 글이었다. 드 만은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문학] 비평이 자체의 근원에 대해 성찰하는 경지에 이를 만큼 스스로를 면밀히 검토하는 일에 진정으로 게을리 하고 있지 않은가.” 요컨대, 문학 비평에서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성찰’이라는 것이다. 드 만에 따르면, 표면적으로 “타자에 대한 관찰이나 해명”의 형태를 취하지만, “항상 자신에 대한 관찰을 유도하는 수단”이어야 하는 것이 문학 비평이기 때문이다. 문학 비평은 비평의 대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던지는 시선이어야 한다는 것, 문학 작품을 향한 ‘나’의 준엄한 시선은 곧 ‘나 자신’을 향한 준엄한 시선이어야 한다는 것, 결국 비평적 분석과 평가는 이를 수행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분석과 평가이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드 만으로부터 얻은 소중한 교훈이었다.
마음의 평화와 함께 이 같은 교훈을 얻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그 동안 나는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에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작품에 대한 나의 이해와 분석과 평가에 대해 끊임없이 되돌아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이었는가는 여전히 되돌아보아야 할 과제다.
어쩌면, 내가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에 시간을 보내면서도 ‘문학 평론가’ 또는 ‘비평가’라는 호칭을 붙이는 일에 조심스러워 했던 이유도 자의식에 따른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신문 기자나 잡지 편집자가 그런 호칭을 붙여 이를 활자화한 경우를 빼고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문학 평론가’ 또는 ‘비평가’로 밝힌 적이 없다. 과연 나는 ‘문학 평론가’ 또는 ‘비평가’라는 호칭에 값할 만한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단순히 영문학을 공부하는 문학도로서 우리 문학 작품에 대한 나름의 ‘꼼꼼한 읽기’를 시도하는 독자, 말 그대로 한 명의 독자에 불과한 존재 아닌가. 그것이 내가 판단하는 나의 실체다.
여기서 다시 옛날의 일화로 돌아가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같은 과의 동료 교수 가운데 한 분이 지방 출장을 다녀 온 뒤에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 옛날 유학 시절에 전자공학과 학생의 앰프를 고쳐준 적이 있소?” 그리고 그가 말을 이었다. “그 학생이 현재 지방의 유명한 공대 전자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 그가 그 얘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것이오. 전자공학과 교수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그런 얘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소.” 나는 그 이유를 안다. 그는 자신이 전자 회로를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설계하는 ‘학자’이지, 전자 기기를 수리하거나 조립하는 ‘기술자’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나 자신에게 ‘문학 평론가’ 또는 ‘비평가’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데 주저하는 것은 내 자신이 영문학을 공부하는 ‘문학도’일 뿐 문학 평론 또는 비평이라는 지난한 작업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문학 평론가’ 또는 ‘비평가’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생각에 잠기는 동안에도 라디오에서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은 계속되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선가 시인들과 작가들이 언어적 형상화를 통해 소중하고 아름다운 문학 작품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듯. 하지만, 지금 내가 음악의 선율에 귀 기울이듯, 그들이 창작한 작품을 향해 세심한 눈길을 주는 것을 뛰어넘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혹시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학 작품에 대한 분석과 평가라는 명분 아래 그들의 작품을 둘러싼 ‘아우라’를 훼손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하자면, 해부하기 위해 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적어도 나는 나의 모든 행위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점만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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