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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9356279
· 쪽수 : 168쪽
책 소개
목차
I
II
III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마치 이 세계와 우리들 자신이 정확히 오후 네 시에 창조된 것 같았다. 이전의 우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런 기억 없는 의식, 그리고 텅 빈 오후 네 시라는 형식, 그것이 있을 뿐. (…)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자신을 기억해 내려는 행위는 무용하며 오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감각을 따라가는 것만이 최선임을, 우리는 곧 알아차렸다.
"갑자기, 나는 내가 누군지 몰라요. 나와 내 일행, 우리는 서로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 대한 기억이 모두 없어요. 그냥 막연하고 희미한 느낌이 있을 뿐, 그런데 그 느낌도 우리들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알아요, 무척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을.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오늘 오후 네 시에 일어났어요. 마치 그 시간에, 우리 둘이 함께 이 상태로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아요. 우리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여기로 오려고 했을까요?"
그런데 나, 내가 어째서 폐허를 유발하느냐고? 일곱 살 때, 나는 집을 부수었다. 속옷을 태웠고, 책가방을 태웠고, 가족을 태웠고, 잠든 머리를 깊이 숙이고 걸어갔다. 나는 누구도 살게 하지 않는 집이 되고 싶었다. 내 집의 화덕은 차갑고 거울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으며, 정원에 있는 그 무엇도 꽃피우거나 열매 맺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입술은 닫히고 모든 눈꺼풀은 덮인다. 나는 창 없는 집이다. 나는 돌 던져진 집, 불태워진 집이다. 경외심을 일으키는 추문의 집이다. 나는 페스트가 발발한 집이다. 주방 화덕에서 건져 낸 불붙은 장작으로 모든 벽과 문을 그슬리는 정화 의식을 행한 집이다. 나는 최후까지 유예된 서류이며 영영 읽히지 않은 원고다. 영원히 되풀이해서 새로이 쓰여야만 하는 한 권의 책이다. 나는 홀로 집에서 나와 홀로 집으로 들어가고, 그 누구도 식사에 초대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혁명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전복하지 않는 전복의 음모를, 목적지 없는 내 여행을 숨긴다. 내 음모와 여행은 무기한 연기되거나 혹은 영원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게 될 산등성이의 굽이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미친 말을 타고 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투성이 편지가 잘못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 꺼진 집 안으로 스며든 달빛 속에서 두 팔을 늘어뜨리고 홀로 앉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매장되지 않은 죽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우루이기 때문이다. 우루는 잠든 머리를 완전히 숙인 자세로, 어린 시절에 부러진 목뼈를 흔들며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