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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91189584337
· 쪽수 : 316쪽
· 출판일 : 2020-10-30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어느 날 저녁을 먹으러 온 미카가 지금까지 쌓인 것을 토해내듯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한테는 시간이 별로 없구나.”
“갑자기 왜?”
뻐꾸기가 여덟 번 울었다. 나무꾼 콤비가 교대로 톱질을 했다.
“벌써 서른다섯 살이잖아.”
미카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는 남녀 인형이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미카의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한순간 다른 사람으로 의심될 만큼 공허한 곡선을 그렸다. 영업을 마감하기까지 앞으로 한 시간. 시어머니는 이미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고, 가게에는 주방에서 일하는 사치코와 카운터석에 앉은 미카까지 두 사람뿐이었다.
“남자에게 평가를 받지 못하면 여자는 무가치하다,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남자더라도 어쨌든 연애하는 것이 솔로인 것보다는 낫다. 이렇듯 사회에 횡행하는 낡은 규범에 ‘NO’라고 말하는 그룹, 원기왕성하고 자존감과 매력이 넘치는 그룹으로 만들고 싶어. 멤버끼리 경쟁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이 그룹은 사이좋고 즐겁게 활동하게 하고 싶어. 슬금슬금 팬의 심기를 살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생각이야.”
미카는 진지한 투로 말을 이었다.
“이쪽 업계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여자가 바리바리 챙겨서 서비스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잖아. 그러지 말고 팬과 아이돌이 연대감을 가지고 함께 신나게 놀면 좋겠어. 보는 쪽, 보여주는 쪽, 즐기는 쪽, 즐거움을 주는 쪽, 그런 담장을 허물고 싶어. 아이돌과 팬이 일심동체가 되는 거지. 누가 헌신하거나 헌신을 받지 않아도, 여자와 남자 모두 행복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서두를 것 없잖아. 미카는 미카의 속도에 맞추면 되지.”
어쩐지 목소리가 건조해졌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미카는 이렇지 않았다. 세상이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규범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시야가 넓고 공부도 열심이라 만나자마자 최신 뉴스에 대해 견해를 말하기도 했다. 피해자가 불합리하게 비난을 당하면 화를 내며 펄펄 뛰었다. 미카는 언제나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감정이입했다. 돌이켜보면 미카는 처음 만났을 당시부터 아이돌 외에는 안중에 없는 듯하면서도 늘 무슨 형태로든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했다. 미카와 같이 있으면 세상이 넓고 선명한 색채를 띤 것처럼 느껴졌다. 미래를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늘 당당하던 그 전사는 두 번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르겠다. 그런 예감이 차가운 방을 천천히 감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