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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0526883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3-05-2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1~17 …… 10
저자소개
책속에서
두 남자는 경계하면서 스스럼없이 악수한다. 속으론 으르렁거리면서도 손잡고 눈웃음치는 것이 남자들의 속물근성이다. 준혜를 향한 감정은 공통분모일지라도 호인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이 진분수인가 생각해 보았다. 준정분의 준혜. 주일분의 준혜. 명확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자연수인가? 음수? 양수? 정수? 답은? 두 사람 다 자신이 없다. 오리무중이다. 웃음 제작공장. 그 사람은 아니지만, 찰나를 잘 이용한 사람이군. 준혜의 삼 년이 이 사람에 의해 웃음이 만들어졌나? 그 양이 적지만. 남자인 자기가 봐도 좋은 얼굴이다. 부모의 축복 중 최대의 것. 도시인답게 세련되고. 자신의 촌스러운 모습이 부끄럽다. 어차피 난 촌놈이야. 고향은 논밭도 적고 바다만 넓은 작은 바닷가. 이름난 항구도 아니다. 외국의 배도 드나들지 않고 작은 고기잡이배가 시계추처럼 드나드는 가난한 어촌. 세련이라는 말은 삼천리보다 먼 이야기. 그러나 준혜는 당신의 것도 아닌 듯 싶소이다. 추측이 바램에 의한 강박관념일지 모르지만.
같은 형제이지만 생각하는 것이 전혀 달라서 생활하는 것도 다르다. 그녀는 언니로서의 권위를 부리진 않았다. 동생의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간섭은 오히려 혜연을 날뛰게 하므로 무심히 지냈다. 무심함은 겉에 보이는 형식일 뿐 실제 생각은 항상 위태롭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핏줄이 주는 당연한 흐름이다. 농번기 휴가를 맞아 집에서 지내지 않고 혜연을 찾아갔다. 아예 살림을 차렸군. 혜연의 방에 걸린 남자의 옷을 보며 생각했다. 둘째 딸, 그 자리가 얼마나 서러운지 언니는 모르지. 질렸어. 어려서부터 항상 헌 것이었어. 언니의 헌 물건, 언니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랬던 때도 있었어. 헌 옷이 입기 싫어서. 네가 먼저 태어나지 그랬니. 그러나 이것은 운명인걸. 손이 귀한 집의 둘째 딸. 준혜도 혜연의 서러움을 느낄 수 있었으나 그녀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새 옷이 좋았지만, 혜연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마냥 즐거워하지 못했다. 사춘기를 맞이해서 혜연은 준혜가 질릴 정도로 반항했다.
겨울비가 으스스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날. 추워진 몸을 이끌고 혜연이 돌아왔다. 근영은 좁은 방에 버티고 있는 혜연의 그림을 보며 홀짝홀짝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연탄불이 꺼진 방은 춥다. 비에 젖은 혜연의 몸이 견디기에 한기뿐인 방이 송구하다. 반가움과 놀람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서둘러 연기를 마시며 연탄을 피웠다. 매운 연기가 코, 입으로 들어오는데도 매운 줄 모르겠다. 얼마 만인가?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 일주일 훨씬 지났다. 어디에 있었느냐는 물음 따위는 의미 없는 말장난이기에 혜연의 젖은 몸이 말라주기를 기다렸다. 돌아온 사실만 감사하고 싶다. 그동안의 행적이 내게 무슨 이득이 되리오. 알아서 병이 되는 일을 알려는 바보는 되지 말자. 혜연은 보채지 않으면 자기 쪽에서 토해내는 버릇이 있으니 기다리기로 했다. 침묵에 지독히 약한 혜연의 성격을 근영은 알았다. 가만 두면 스스로 터지는.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뱉어버리는 위험하고 가여운 인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