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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 ISBN : 9791190529433
· 쪽수 : 180쪽
· 출판일 : 2025-11-01
책 소개
목차
제1부 쓰는 사람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행복
가려 먹기
문장 수집가
편지 한 장
모두 빛나는 인생
애쓰는 마음
올사람은알아서 온다
노을이 주는 위로
쓰는 사람이 작가다
내 것을 내어주는 마음
에세이로 기록하는 행위
담배에 대한 몽상
더 좋은 나를 만드는 곳
제2부 그때, 그대
열기에 익어가는 건
건방진 커피
늙은 호박
나를 들썩이게 하는 것
맏이의 고충
존재의 가치
슬픔의 방문
땅을 가지고 노는 일
또 다른 여행
제3부 그때, 그리고 나
도토리 한 알
기억 저편의 그녀
그해 시내
분수 쇼
빨래로 털어버리는 것
야당
끈기가 없다는 건
잘못한 건 없지만
딱 이정도가 좋다
제4부 결국 행복
내편인 듯 내편 아닌 남편
비워내는 연습
서해 바다
캠핑의 맛
어른의 멋
너의 부표가 되어 줄게
눈물이 많은 여자
청바지
제발을 붙여 말한다는 건
꽃을 건네듯
April shower
될 것 같은데
들락날락하는 관계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차피 쓰는 사람
우리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내가 여기에 왜
끼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업을 듣지 않고 외부로 나간다는 것에
마냥 들떠 있다. 문제 풀이에 내가 걸릴 것 같은 수학 수업도, 단어
암기에 파묻혀 있는 영어 수업도 오늘은 듣지 않아도 된다. 등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방을 챙겨 공원으로 향했다. 도착한 공원에
는 각 학교에서 뽑혀 나온 학생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공원은 지역 학생들의 백일장 현장이었다. 원고지를 제공받고 학
교별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충일을 앞둔 이날의 주제는 ‘통일’이
었다. 지금껏 나는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통
일은 그저 TV에서나 다루기 좋은 주제라 생각했다. 글짓기를 위해
주어진 시간은 단 두 시간. 글은 단 한 글자도 나오질 않고 주야장
천 한숨만 나왔다. 애꿎은 잔디만 뽑아 댔다. 수업을 듣지 않고 야외
로 나오게 되어 들떠 있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쩌다 이 따
뜻한 봄날 공원에 앉아 끙끙 앓고 있는 건지. 한 줄도 못 쓰고 앉아
있었던 두 시간은 열일곱 인생에서 겪는 최대의 고통이자 시련이었다
우등생은 못 되더라도 모범생은 되어야지, 라는 마음가짐으로 학
교생활을 했다. 나에게 모범생의 첫 번째 기준은 바로 숙제였다. 국
어 시간에 숙제로 제출한 산문 한편으로 인해 학년을 대표해 이 자
리에 앉아 있는 건데, 그만 다음 숙제를 제출하지 못한 학생이 되고
말았다.
함께 대회에 나갔던 한 학년 선배는 주제를 듣자마자 원고지를 채
워 나갔다. 부러운 눈으로 선배의 모습을 쳐다보다, 흘러가는 구름
무리에 눈길을 쏟다 보니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결국 작품은 제
출하지 못하고 백일장은 끝이 났다. 막힘없이 글을 쓰던 선배는 백일
장에서 1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글에 대한 로망을 품은 게 이때부터였을까. 글과 관련된 업종에
구직활동을 했고, 결국 지역신문사 취재기자가 됐다. 하지만, 백일장
에서처럼 알량한 글쓰기 실력은 금방 바닥을 보였고, 마감 스트레
스에 시달렸다. 오타가 나거나 구독자의 항의 전화라도 받는 날이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한 번의 이직을 했고, 결혼을 핑계로 5년
간의 기자 생활을 접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어린 시절 학업으로 인해 마음껏 해보
지 못한 분야에 눈을 돌렸다. 다양한 공예 분야에 대해 배우다 접하
게 된 캘리그라피. 이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스트레스받지 않
고 꾸준하게 하다 보니 어느새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글을 쓰
는 기자에서 글씨를 쓰는 캘리그라피 작가가 된 것이다.
특출 난 재능도 없으면서 글쓰기에 대한 로망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시민기자나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뭐라도 쓰고 있었다. 진짜
글을 써야 할 때, 쉽게 물꼬를 틀 수 있게 만든 안전장치인 셈이다.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에서 배지영 작가는 부사를 멀리하라
고 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몹시’라는 부사를 즐겨 쓴다고 한다. 나
또한 즐겨 쓰는 부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어차피’. 사전적으로는 ‘이
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또는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다.
난 무엇을 하다가 실패했을 때, 또는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
았을 때 면피용으로 많이 쓰고 있다.
캘리그라피 작가 활동을 하면서, 작품을 출품하는 일이 많다. 나
는 다른 이들과 달리 고민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작품 공
모 공고가 뜨자마자 바로 작업해서 작품을 보내는 일이 많다. 이 글
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감보다 훨씬 앞서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차피 마감은 정해져 있고, 써야 되는 거면 빨리 써서 끝내버리
는 게 스트레스를 덜 받지 않을까. 질질 끈다고 해서 더 좋은 작품
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크지도 않다. 더 생각하고 고민해서 쓰면
좀 더 나은 작품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루다가 다른 일정에
밀리고, 아프기라도 하면 시도조차 못 할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해
놓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 크다. 고작 며칠 더 고민한다고 해
서 작품의 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부사 어차피. 로망과 현실은 다르지만, 결론은 똑
같이 쓰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쓰는 사람인 것
이다. 한 글자 차이로 뜻은 달라지지만, 글을 쓰던 글씨를 쓰던 어차피 쓰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에 만족하며 살다 결국, 에세이 쓰기에 이르렀다.
쓰는 사람이라는 연결고리를 자양분 삼아 버틴 게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
“저 요즘 글 쓰고 있어요. 제가 쓴 글로 캘리그라피 작품
만드는 게 꿈이거든요.”
에세이를 쓸 것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냈다. 중도 포기를 막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중소도시에서 캘리그라피 강사로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는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
신이 말한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크기에 열과
성을 다해 노력했다. 그 결과물을 한 권으로 모았다. 글과 글씨는 물
론이고 행복한 삶을 위해 애쓰는 마음을 가득 담았다. 애쓰는 사이
사이 행복이 영글었다. 아직은 서툴고 소박하지만, 나의 문장이 당신
에게 가 닿아 일렁이기를 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