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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0569729
· 쪽수 : 260쪽
목차
작가의 말 6
1부
사고파는 일을 배웠던 시절,
평창 1973~1979
가게를 열고,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웠다 13
멜로디언을 치는 피아니스트 19
풍선값이 풍선처럼 불어나네 24
“아저씨, 내가 사과를 봐서 참아요” 29
빵까지 팔게 된 문구점 35
사람들이 릴레이로 옮겨준 배추 41
우리 가게만 파는 명물, 못생긴 노트 46
마당에 내놓고, 앨범을 떨이로 팔다 51
“여기 새댁 돈이 어느 것이오” 57
왜 싸우면 눈물부터 나는지 63
꼬마들에게도 대목이 있다 69
일일 매일 일하니, 이러다 죽겠구나 74
미루나무가 준 선물 79
시루목 넘치면 피난 가세 84
벽을 문이라고 밀고 나간 분옥이 89
유치원 아들도 신문 배달 95
“괜히 산다고 하다가 못 사면 창피하다” 101
좋은 씨앗이 있다는 소리만 들으면 106
소나기재 넘어 울며 가는 이삿길 111
2부
책을 팔았던 시간,
영월 1979~1983
문구 익숙해지려니 서점 장사 119
책 훔치는 아이, 카드 훔치는 숙녀 125
몸썰머리 나는 아저씨 오토바이 부대 131
겨울밤 나만을 위한 시간 137
한식에서 양식으로, 식탁이 달라졌어요 143
돈 갚으러 와서 책을 잔뜩 사간 청년 149
전 재산을 노름돈으로 내준 동생 155
3부
살기에 벅찼으나 포기하지 않은 세월,
서울 1983~1995
미쳤지, 여기를 왜 왔을까 163
방문판매 벨 누를 때 손이 떨렸다 169
500 타래미 더덕이 도착하다 175
딩동, 신데라빵이 왔어요 182
이혼한다던 부부를 화해시킨 압력솥 187
사무실에 생긴 내 책상과 전화 193
“강원도 사람이라 말보다 요리가 빨라요” 199
명함은 민들레 씨앗 205
양말 공장에서 연 요리 강습회 211
냄비 팔아 현찰로 새 차를 산 방 여사 217
은행 자판기 커피가 접대였던 민 여사 223
물리치료는커녕, 몸살이 나다 229
배 타고 제주도에 가서 연 요리 강습 235
냄비 하나 못 팔던 남편이 달라졌어요 241
밥을 전부 사먹는 집에 냄비 파는 방법 247
눈물이 뚝뚝 떨어져도 가장이기에 253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러다 어느 날인가 한탄을 멈추고 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많은 주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 전공을 살려 일하기도 하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헤쳐 나가며 살았습니다. 투자금도 없이 맨몸으로 세일을 하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주부들이 살림하면서 직장을 다닌다는 것은 1인 2역이 아니라 1인 3역, 4역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일이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살이를 같이하는 많은 주부가 있어 위로가 되었습니
다. 돈도 벌고 아이들도 키우고 살림도 하느라 편히 잘 시간도 없고, 쉬는 날도 따로 없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꿈을 잃지 않고 자기도 함께 성장을 했습니다. 주부들은 빛나는 자리는 아니라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는 자식들을 대학에 못 보낼까봐 아무리 어려워도 일을 그만두지 못했습니다. 또 쉽게 그만두면 ‘우리 엄마도 뭘 한다고 하다 쉽게 포기하던데’ 하며 자식들이 본을 볼까봐 그만두지 못하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일하는 주부들은 자기 가정을 야무지게 꾸려 갔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습니다.
세일을 하면서 야박스럽고 야속스런 사람을 만나면 내가 너무 초라하고 못난 것 같아 좌절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은 많은 분이 있었기에 길가에 피는 민들레처럼 웃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작가의 말)
가을 운동회가 가까워오자 평창 장돌뱅이 아줌마들이 장난감을 도매로 달라고 모여들었습니다. 자기들끼리는 ‘똘마니 부대’라고 불렀습니다. 이때다 싶었습니다. 나도 똘마니 아줌마
들 틈에 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친정어머니한테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뭐 하는데 돈이 필요하냐고 묻는데, 쓸 데가 있으니 한 달만 쓰고 이자 쳐서 갚을 테니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친정어머니한테 빌린 돈으로 남편은 충북 제천에 가서 장난감을 해왔습니다.
자신 있는 건 아니지만 몇 날 며칠을 밤새워 울면서 연구하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다짐했습니다. 계촌학교 운동회가 그해 첫 번째 날이었습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아직 자
고 있는 아들을 남편한테 맡겨놓고 이웃 몰래 떠납니다. 새벽 4시에 똘마니 아줌마들과 버스부(터미널)에 모여 4시 30분에 출발하는 차에 각자의 짐을 싣고 계촌으로 향했습니다. ‘전순예, 울어서는 안 돼. 이것은 잘살 수 있는 기반을 닦는 거니 용감하고 씩씩하게 잘해내야 해.’ 먼 산을 바라보며 눈을 껌벅거리고 갔습니다.
오랜만에 분옥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집은 논이 아주 많은 부자라고 소문이 났답니다. 자기는 논이 없는 산골짝에서 강냉이밥 먹는 게 싫어서 시집가면 쌀밥만 먹겠다고 내심 좋았답니다. 막상 시집와서 보니 논 몇 마지기에 산비탈 밭이 전부여서 간당간당 하게 겨우 밥 먹고 사는 집이었답니다. 분옥이 신랑도 국민학교를 나오고 한문을 좀 배운 것이 전부입니다. 시할아버지에 시동생이 둘, 시누이가 둘이었습니다. 시아버지나 신랑이나 다들 순하기만 해서 제 털 빼서 제 구멍에 박는 답답한 사람이었답니다. 시어머니는 시장도 안 가고 집 안에만 곱게 계셨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난감해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친정어머니는 수단은 없었지만 살림은 야무지게 하는 분이셔서 독하게 일을 가르쳐줬습니다. 그때는 혼자 두부도 만들고 엿도 고면서 어머니가 많이 야속스러웠다고 합니다. 초가을에 시집와서 그해 겨울에 엿장수로 나섰답니다. 양반이고 한학자인 시할아버지는 어린것이 집안 망신시킨다고 노발대발하셨답니다. 하루 이틀 생각한 게 아니기 때문에 벽을 문이라고 여기며 밀고 나가기로 했답니다. 겨울에는 엿을 고아서 팔고 여름에는 나물이며 집에 없는 건 사서라도 팔았답니다.
식구들이 놀지 못하게 없는 소와 배냇돼지(주인과 나눠 갖기로 하고 기르는 돼지)도 얻어다 키우면서 억척을 떨었답니다. 그렇게 억척 떨고 살아서 시누이와 시동생을 다 고등학교까지 뒷바라지할 수 있었답니다. 살림하면서 짜고짜고(아끼고) 모아 땅도 늘렸답니다.
“팔자 좋은 너는 고생이 무엇인지 모를 거여” 합니다. 나같이 고생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보면 나는 입도 못 벌릴 정도로 고생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감히 내 처지를 불평할 수 없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