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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0910002
· 쪽수 : 323쪽
· 출판일 : 2020-06-29
책 소개
목차
선재의 비파 7
뿌리 뽑힌 노래 25
선사시대 48
은하 69
아버지의 노래 88
그리고 바라지 가락 117
이제 십일월은 152
설연화 189
삼만 구천이백사십 가닥의 소리와 2 06
시원의 노래 251
처음으로 소리가 시작되는 별 262
해설 | 시원의 노래와 존재의 시원 | 우찬제 309
작가의 말 320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머니는 가끔 ‘키타맨’ 집은 왜 그렇게 우중충한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던데 오늘만큼은 완전히 달랐다. 재색기와지붕과 살구꽃이 상충하면서 뿜어내는 기운은 독특했다. 기와지붕이 고독 속으로 몰두하느라 점점 침잠하고 수축하면서 어두워져 가고 있다면 살구꽃은 융기하고 확산하고 커져가느라 발랄하고 생기로 가득했다. 연분홍 살구꽃잎이 웅크린 기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기와 속에 있을,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렸을지도 모를 소리들을 끄집어내려는 듯 섬세하게 알랑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금방이라도 소리들이 쏟아질 것 같았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어쩌면 태초에서나 비롯할 초롱초롱한 소리들이 들려올 것만 같아 그는 귀를 세웠다(‘선재의 비파’)
아버지는 이 노래를 할아버지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누구한테서 배우셨어요?” 어린 그가 여쭈었다. “그야 증조할아버지에게서 배우셨겄제.”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럼 증조할아버지는요?” 그가 다시 여쭙자 “허허, 고조할아버지에게서 배우셨을 거고.” 했다. “그럼 맨 처음에는 누가 탔어요?” 그는 또 여쭈었다. “글쎄다. 누굴꼬? 애비 생각에는 요놈이 알 것 같구나. 요놈만이 제가 온 곳이 어딘지 알 테니.” 비파 소리를 앞서가듯 아버지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아빠, 비파에서 아빠 냄새가 나요. 할아버지 냄새도 나고 증조할아버지 냄새도 나는 것 같아요. 여기서요.” 그는 울림통으로 얼굴을 바짝 대고 흠흠, 냄새를 맡으며 재재거렸다. 아버지가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빙긋이 웃었다(‘뿌리 뽑힌 노래’)
“은하야, 일곱 뼘 반이야. 넌 내 손으로 일곱 뼘 반이라고. 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생각했지…… 이 손은 잊지 않을 거야. 일곱 뼘 반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선사시대의 사내가 땅바닥에 돌덩이를 던질 때처럼 그는 무작정 거칠었다. 깨진 돌들 중에서 연장으로 쓸 만한 것을 골라 주울 때처럼 신중했다. 촉을 들고 사냥을 나갈 때처럼 경건하고, 사슴을 향해 그것을 던질 때처럼 날렵했다. 잡은 사슴을 집으로 가져와 아내에게 줄 때처럼 의기양양했다. 그의 손은 그의 눈이었다. 그의 손은 귀고 그의 손은 코였다. 그의 손은 입이고 그의 손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는 자기 손이 닿을 때마다 그녀가 무엇인가로 새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무엇인지도 모를 그것은 어딘가로 훌쩍 날아갈 듯 낯설었다. 자부룩 높았다. 까마득하고 어리어리했다. 그는 자기의 전생과 이생을 관통해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수천 년을 기다려온 듯 그녀도 마중했다. 아찔했다. 종잡을 수 없이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물결이 전신을 휘감았다. 스물일곱 살의 남자는 비로소 고인돌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늪의 비밀까지도. 어쩌면 바다의 비밀까지도(‘선사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