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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중국문화
· ISBN : 9791191959383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25-01-20
책 소개
목차
서장: 중국을 잘 안다는 착각
중국과 중국 사람을 안다는 것
중국인은 원래 쩨쩨하다(?)
1장 공간과 시간에서 오는 차이
저렇게 큰 나라가
중국인은 타고난 ‘뻥쟁이’인가
쩨쩨함의 뿌리
인명과 재산을 가장 많이 삼킨 황허강
중국 허리를 두 동강 낸 창장강
신령스러운 삼산오악
2장 역사, 문화, 한자, 사람
진시황릉 안 파나, 못 파나?
상상력의 보물 창고 진시황릉
미래 중국의 문화 수도 시안
문자를 발명하자 비가 내리고 귀신이 통곡한 이유
중국 역사를 새로 쓴 유적 은허
중국에는 창세신화가 없다?
마르코 폴로가 극찬한 천상의 도시 항저우
소하가 만들고 조참이 따르다
소 12마리로 나라를 구한 상인 현고
교태가 중국 미남자의 조건(?)
3장 중국인의 심리적 뿌리와 숫자 개념
노려보기만 해도 보복한다
밥 한 번에 천금을 갚은 한신
마음으로 한 약속도 약속
원한은 대를 물려서라도 갚는다
백호도의 호랑이가 99마리뿐인 이유
숫자로 모든 것을 상징한다
숫자로 모든 것을 나타낸다
4장 중화, 중국, 민족, 인구
우리가 세상의 중심, 중국
세상의 중심에 핀 꽃, 중화
중원을 차지하는 자, 천하를 얻는다
중국의 별칭이 그렇게 많다고?
다민족 국가 중국
춤과 노래를 즐기는 위구르족
인구 14억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5장 중국인의 음식과 술
세계적 명성의 베이징덕
비행기와 탁자 빼고 다 요리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없는 중국 요리의 신은?
대부호의 운명을 바꾼 돼지족발 요리 완싼티
중국 술, 그것이 알고 싶다
명주에 숨겨진 이야기: 마오타이와 우량예
역사를 바꾼 술자리와 식사 정치
절반만 말하고, 1절만 불러라
6장 중국과 중국인을 알기 위한 실용적 지식
강태공의 별칭이 많은 이유
5천 년 역사를 아로새긴 명인들
38자에 담긴 공자의 매력
성시 34곳에 대한 기본 정보
역사와 문화로 명성 높은 베이징
중국에도 짜장면과 짬뽕이 있을까
7장 현지화를 위한 실용적 정보
중국을 알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달나라 탐사 프로젝트가 왜 항아공정일까
인공위성에 철학자의 이름을 붙인 이유
기차를 탈 줄 알면 중국의 절반(?)을 아는 것
단거리 교통수단 택시 이야기
모든 길은 웨이신으로 통한다
KFC는 어떻게 난공불락의 패스트푸드점이 되었을까
락앤락은 어떻게 현지화에 성공했을까
8장 중국의 지도자들과 미래
수십 년간 검증받는 중국 지도자
역사책을 놓지 않았던 마오쩌둥
인문학 소양이 깊은 원자바오
실용적 역사 인식으로 무장한 시진핑
시진핑의 30년과 세 개의 30년
인류 역사상 최대의 프로젝트 ‘일대일로’
맺음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훑어보면 두 나라 모두 거의 함께 전성기를 누린 시기가 있다. 8세기 전후를 시작으로 9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50년 동안이었다. 우리는 신라가 676년 삼국 통일을 이룬 뒤였고, 중국은 당 왕조 때였다. 이 최전성기의 가장 큰 공통점은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없었고, 각자 내부적으로도 전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두 나라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전쟁을 포함한 심각한 갈등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14쪽
사드 문제가 불거지고 중국의 이런저런 보복이 전방위로 진행되고 있을 때 내가 기업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저렇게 ‘큰 나라’가 왜 이렇게 ‘쩨쩨하게’ ‘보복’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주 간결했다.
“원래 그렇습니다!” -22쪽
땅은 크고, 그 땅에 존재하거나 나는 산물은 수없이 많다.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가장 많은 것에서 가장 적은 것까지 다 있다. 남아 있는 유적이나 유물도 그렇다. 무게가 1톤에 가까운 수천 년 전의 청동기부터 쌀알이나 머리카락에 글자를 새긴 것까지 다양하다. 이를 다른 말로 ‘박대정심(博大精深)’이라고 표현한다. ‘넓고 크고 정교하고 심오하다’라는 뜻이다. -35쪽
3천 년 고도(古都)로 전 세계인이 찾는 명소 시안(西安)을 상징하는 문화 유적을 들라면 많은 사람이 진시황릉(秦始皇陵)과 병마용갱(兵馬俑坑)을 꼽는다. 현지 사람들은 병마용갱을 한 글자 줄여서 ‘병마용’이라 하고, 진시황릉은 한 글자 또는 두 글자를 줄여서 ‘시황릉’이나 ‘황릉’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시안을 다녀온 우리나라 사람 중 일부는 병마용갱을 진시황의 무덤인 진시황릉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사마천은 《사기》의 세 번째 권 <은본기(殷本記)&g;에 은나라 역사를 기록했는데, 20세기 초까지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사실로 믿지 않았다. 즉, 상은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갑골과 거기에 새겨진 문자가 세간에 떠돌면서 그 출처로 은허가 주목받았고, 1928년부터 정식으로 발굴되면서 실체가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은허 발굴에서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부호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도굴당하지 않은 채 발굴되었는데, 엄청난 양의 부장품도 대단했지만 더 놀라운 점이 있었다. 부장품들을 통해 본 부호의 모습이 놀랍게도 여전사였다는 것이다. 갑골문 등의 기록에도 부호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전사로 3천 명의 정예병과 1만여 명의 무사를 거느리고 각지를 정벌하여 20여 소국을 정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