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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2331546
· 쪽수 : 344쪽
· 출판일 : 2023-07-11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4
걷기 전에 11
걸으면서 18
-1일 차 20
내 고향 마을, 갑산
병마와 함께한 어머니의 삶
어머니를 떠올리면
고지기였던 아버지의 삶
머슴살이와 개장국
-2일 차 40
아버지의 죽마고우, 내곡 어른
‘Korean Diaspora’의 DNA
부모님이 남긴 보물
형수님의 시집살이
존경하는 형님을 보내며
-3일 차 62
소 먹이던 일곱 살
그땐 그랬지
반짝이는 옷소매, 합천 계산초등학교
아홉사리 고갯길, 합천 초계중학교
첫 타향살이, 대구 계성고등학교
고3의 눈물 젖은 입주과외
-4일 차 86
신앙의 길에 들어서다
촌놈의 신입생 생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신앙의 스승을 만나다
실험적 공동생활
순박한 대학생 가정교사와 학생들
-5일 차 110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Age Shooter’를 꿈꾸며
광주 보병학교와 군복무
운명을 결정한 첫 직장, 대우중공업
-6일 차 132
워라밸이 보장된 두 번째 일터, 호남정유
역마살도 즐거운 회사
근속 15년 소감문
선진기술의 도입과 국산화 유공 표창
-7일 차 150
마흔셋 정인조의 인생 목표
철학도의 진로 갈림길
2001년 창업과 성장
-8일 차 168
아내를 만나고 결혼하기까지
김치영 목사님의 주례사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
-9일 차 184
쉽지 않았던 첫 시작, 신혼살림
정가네 가족 이야기
첫 손주 탄생에 감사하며
관계의 최고봉을 향하여
천사의 질투를 염려한 행복
-10일 차 202
2023년 3월 1일, 결혼 44주년에
내게 남은 김치영 목사님의 흔적
부천으로의 이주, YMCA와의 만남
-11일 차 216
지평교회를 만나고
자연이 하나 되는 녹색교회, 지평교회
큰 바위 얼굴, 담사와 목정 선생님
지평교회에서의 귀한 만남
-12일 차 232
두 선생님과의 문화유산 답사기
예배당 맨 앞자리 부부의 신앙
2022년 시무 장로를 은퇴하며
‘한 알의 밀’ 선언과 복음서
-13일 차 250
하늘의 뜻을 담는 곳, 하담 텃밭에서
신영복 선생과의 만남
공익모금재단 (사)부천희망재단 설립
기부자에서 모금가로
-14일 차 268
‘걷는 자’는 누구인가
내가 생각하는 모금가의 길
모금가의 실망과 희망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되기까지
-15일 차 282
(사)한국지역재단협의회 설립
철이 덜 든 철학자의 나눔 역사
성공회대학교의 모금과목 개설
한신대학교 ‘이해관계 상충 방지 내규’
-16일 차 296
외갓집을 찾아 떠난 여행
4박 5일 북한 방문기
-17일 차 314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행
기독교인 구약 성지 순례
-18일 차 328
걷기 행사, 그날의 보도
걷고 나서 338
에필로그 342
정인조 이력서 346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내 고향마을, 갑산
내가 태어난 갑산 마을은 조선 시대에는 초계군 갑산면에서 면 이름과 같은 갑산이다. ‘원갑산’으로도 알려진 오래된 역사를 지닌 마을로 산줄기로는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분기한 진양미타대암단맥의 마지막인 용덕산(해발 231m)이 마을 북쪽과 서쪽을, 황강이 동쪽을 감싸며 흐르고 있다. 용덕산은 조선시대 초계군수가 가뭄 때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해서, 이곳은 용의 덕을 보는 것이라 해서 ‘용덕산’이라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무운절(묵은 절, 古寺)이라고 부르는 뒷산 자락의 밭은 옛 절터였음이 밝혀졌다. 그곳에서는 고려 시대 사용하던 종이 발굴되기도 했다. 마을 앞 황강 건너엔 우리 초계 정가의 시조를 모신 옥전서원이 옛 가야 소국인 다라국의 옥전고분과 나란하게 있고, 마을 뒷산엔 진양 강씨 선영이 있는 갑산재, 옆 마을엔 초계 변씨 시조 사당인 영모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풍수지리설의 명당이라는 생각이 든다.
병마와 함께한 어머님의 삶
이미 저세상으로 간 동생을 낳은 뒤에 얻은 척추결핵으로 어머니는 30년 가까운 세월을 고생하셨다. 어린 나이에 동네 사람들이 “인천댁 오늘을 넘기겠나?”라고 수군대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 그 말이 어머니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자라면서 알아차렸다. 그때마다 유명한 무당을 불러 벌였던 굿판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했던 것 같다.
(중략)
그 당시에 나는 한가지 버릇이 있었다. 고등학교 다니던 대구에서 고향 집을 다녀올 때, 고향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고향마을이 있는 고개를 단숨에 올라서 마을 복판에 있는 우리 집을 살폈다. 우리 집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어머님이 별세하실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살펴본 우리 집이 조용하면, 안도의 큰 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큰아들보다 13살이나 어린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지극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꾸중을 들은 적이 없다. 계성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구로 유학을 떠난 후에도 아들이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셨다는 얘기를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들었다.
고지기였던 아버지의 삶
1987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경술국치(1910년) 다음 해인 신해년에 없는 집안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격동의 시절을 온몸으로 체험하신 아버지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지랭이 촌농부였다. 아홉살 땐 꼴 머슴으로 살았고, 일제 시기엔 일본 오사카와 고베항의 일용 노동꾼으로 다녀오셨다고 했다. 마을 초계 변씨 종중 논밭을 경작하는 고지기(창고지기) 역할도 하시며, 심는 대로 거두는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한평생을 살다가 가셨다. 아버지가 고지기 역할을 했던 나의 어린 시절, 온 가족이 변씨네 묘사 음식을 만들 때는 정말 즐거웠다. 아버지와 함께 변씨 묘사에 참석해서 이분들의 귀여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이내 아버지의 직업이 자랑스럽지 못한 것을 눈치를 채고는 따라다니지 않았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 생각해보니 가족을 위해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내신 참 자랑스러운 아버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