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4171867
· 쪽수 : 268쪽
· 출판일 : 2025-09-18
책 소개
이 죽음을 시로 이동시킬 수 있을까
시가 얼음을 녹여, 죽음에서 지푸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이수명 시인의 날짜 없는 일기 세번째 권 『흰 컵의 휴식』을 출판사 난다에서 펴낸다. 『내가 없는 쓰기』 『정적과 소음』에 이어지는 이번 책은 시인 이수명이 2024년 1월부터 12월까지 한 해 동안 쓴 일기로 2~3일에 한 번씩 쓴 짧은 메모이자 자생적 생기를 띤 계절 일기이다. 사물과 상황의 사생을 위주로 구도나 배치 없이, 신경써서 구성하지 않는 편안함에 기대어 있는 이 조각들은 방향 없이 이어지며 그날의 기분에 따라 태도에 따라 말의 색과 톤, 높이와 위치, 명암도 다 다르다.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시인은 말한다. 글을 쓰는 1년 동안 불충분하게나마 다른 사람이었을지 모른다고. 날짜 없는 일기의 세번째 권을 묶으며 이수명 시인은 짧은 날것의 언어 호흡이 글쓰기 한쪽에 어느덧 자리를 잡게 된 느낌을 받는다. 이 일기는 일종의 사생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나 마주치는 장면을 특별한 압력을 빌리지 않고 사생하듯 스케치해보려는 시도였다. 보는 자가 있기에 있는 것이 그대로 그려지기는 쉽지 않아 사생 지향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러한 방식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사생이 가능하게 된다. 입구와 출구가 딱히 필요 없는 글. 어쩌면 시인은 일기니까, 시처럼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잠깐씩 또다른 시를 흉내 내는 건 아닐까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다시 빠져나오는 반복. 그 어디로 들어가기보다 사생성에 힘입어 나오려는 쪽으로 움직인 글들. 시인은 낯선 어조를 찾는다. 아직 닿아보지 못한 어조, 더 낮고 흔들리는. 다시 내려서는, 다시 밝아오는, 분리된 어조. 불쑥 나타나는 어조를(18쪽). 시는 사물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묘사할 수 있을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정확한 것이다. 정확해야 신비롭다(35쪽). 시인은 아무래도 1월의 일기를 쓸 때의 내가 아니다. 그 어느 날의 내가 아니다. 아침의 단호하던 내가 아니며, 방금 전에 거리를 쏘다니던 사람이 아니다. 이상하고 명랑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150쪽). 어느 메타포에도 휘감기지 않는 단일한 흰색의 컵, 어떤 숨겨진 패턴이나 층위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컵을 들어올리려는 손가락들이 컵의 표면에 이지러져 비쳐도 컵의 휴식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흰 컵의 휴식, 엔트로피로부터의 휴식, 지상에 처한, 지상을 입고 있는 존재의 지상으로부터의 휴식. 아무도 방해하지 못한다(82쪽).
납작해진 치약을 눌러 짠다. 아직은 더 납작해질 수 있다(15쪽). 시인은 추운 날씨 버스 정류장 아무도 앉지 않은 벤치 아래에서 바싹 마른 갈색의 낙엽을 발견한다. 잎자루도 있고 잎맥이 남아 있는. 눈과 추위에 쓸려가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고 가장 늦게까지 남은 선과 무늬를(16쪽). 강추위에 모든 게 숨죽인 거리, 지속되는 한파에 물은 흐름을 멈추고 두껍게 얼어 있다. 아주 가벼운, 물위에 떠 있는 지푸라기도 꼼짝없이 얼음 속에 박혀 그와 하나가 되어 있다. 얼어붙은 죽음으로 실재하는 지푸라기. 얼음을 깨뜨리지 않는 한 이것에 이를 수 없다. 이 죽음을 시로 이동시킬 수 있을까. 시가 얼음을 녹여, 죽음에서 지푸라기를 꺼낼 수 있을까(30쪽). 책상 위에 투명 플라스틱 물병이 두 개 놓여 있다. 생각 없이 번갈아 마셔서 두 병 다 비슷하게 약간만 남아 있다. 물의 양에 상응하는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언어의 옆길에 있는 물을 마신다. 언어가 알지 못하는 물을 마신다. 꾸밀 수 없는 물을 시인은 그냥 바라본다(64~65쪽). 시인은 가벼운 남방을 걸치고 외출했다가 다가오는 햇빛을 본다. 인도 옆 땅에서 올라온 아주 작은 키의 흰 풀꽃들을 감싸고 있는 빛을. 꽃잎들은 작고 흩어져 있어서 마치 부서져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잘 보이지도 않는 부서진 풀꽃들이 지천으로 빛을 나르고 있었다. 누구도 받아들지 못하는 빛을(92쪽).
이수명의 ‘날짜 없는 일기’
날것의 반형식, 반문학적인 쓰기
시를 버리고 지상에 도달하는 언어들
시를 쓰는 사람이 맞닥뜨린 언어의 편린들을 주워올린 일종의 문학 일기. 1년 동안 쓴 일기를 한 권에 묶고 날짜를 쓰지 않고 월별로만 장을 나누었다. 문학화시킬 필요가 없는 평평한 순간들에 대한 기록, 문학의 반대편으로 나아가는 날것의 글쓰기이자 어떠한 의미도 들어서지 않는 평이한 순간을 유지하려는 시도이다. 시인 이수명은 시에 대한 생각 옆에 무심하게 펼쳐진 시공간과 일상, 사물과 현상을 이리저리 스케치해나가며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경계, 시어와 시어 아닌 것의 차이가 흐려지는 순간을 포착해보려 한다.
1. 내가 없는 쓰기
2. 정적과 소음
3. 흰 컵의 휴식
4.
5.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목차
책머리에 005
1월 013
2월 033
3월 053
4월 075
5월 097
6월 119
7월 139
8월 159
9월 181
10월 201
11월 221
12월 245
저자소개
책속에서
아직도 탁상달력을 사용한다. 사람들을 만나서 일정을 메모할 때 폰을 이용하지만 집에서는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달력에 기입한다. 그것도 주로 연필로 적는다. 연필과 종이의 만남을 지속하는 방법이다. 몇 자 적는 짧은 순간의 정서가 마음을 다독인다. 그날 기분에 따라서 글씨의 크기와 필체와 흘림이 모두 다르다. 나중에 잘 못 알아보는 것들도 있다. 내 글씨가 아닌 것 같은 글자들이다.
_2025년 1월 일기 「6」
발화되지 않은 것들, 언어에 접촉되지 않은 무한 세계의 우둔함 속에 몸을 맡기고 앉아 있다. 나는 그 우둔함 속에서 우둔해지고, 거친 힘 속에서 약화되며, 무한의 흐름 속에 상실된다. 이는 매우 간명한 과정이다. 무한은 명령이고 속삭임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 채 편안하다. 언어의 옆길에 있는 물을 마신다. 언어가 알지 못하는 물을 마신다. 꾸밀 수 없는 물이다. 나는 그냥 물을 바라본다. 발화하지 않는 것을 발화되지 않게 한다.
_2025년 3월 일기 「8」
녹이 스는 것에 사로잡힌다. 녹이 슬고 멈추어진 세계에서 어떤 말 못할 불가피함을 목도한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접어든 것이다. 녹의 색은 형언하기 어렵다. 청록이나 청회색 비슷한, 그러면서 포괄적으로 검은색이다. 시간이 색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시간이 쓰러지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초월과 우월을 내려놓고 시간이 색으로 흐느끼는 중이다.
이런 색을 어디에선가 또 본 느낌이다. 어두워질 때의 짙푸른 색이 그렇다. 이맘때, 가까이 도로로 엄습해오는 어둠뿐 아니라 멀리 산의 어두워지는 형체가 모두 청흑색을 띤다. 녹이 슬 때, 그리고 어두워질 때, 시간은 엇갈린 참회를 하는 것일까. 너무 늦었다고, 너무 빠르다고.
_2025년 6월 일기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