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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2828497
· 쪽수 : 286쪽
· 출판일 : 2024-04-17
책 소개
목차
까마귀 서점 / 7
모카를 위하여/ 31
봄 / 57
정거장 / 87
본래 그 자리 / 117
키 큰 나무들 / 145
터널 / 171
기억색 / 201
티타임대여 / 229
빵 / 259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른이 되는 것은 나이하고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거침없는 말투로 진솔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우의 모습이 나보다 어른스러워 보인다. 여름방학 때 티베트로 떠나기로 했어요. 그래서 주말에 등산을 다니며 고산기후 적응 훈련을 하기로 했고요. 말을 하는 지우의 표정이 한껏 들떠 있다. 길 대리가 지우와 동행하기로 한 것이 이해가 안됐지만, 나는 지우를 와락 끌어안고 어깨를 두드렸다. 지우도 나에게 응석을 부리듯 안겨왔다. 신이 나 있는 지우를 보며 나는 까마귀 두 마리가 새파란 티베트 하늘을 날아오르는 장면을 상상했다.
아침 안개가 자옥하다. 청명한 날씨를 예고하는 것 같다. 전봇대에 앉아있는 까마귀가 통유리창 안을 향해 계속 대화를 요청한다. 나는 까마귀를 쳐다보다가 길 대리가 서서 시집을 읽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면에 퍽 박혀있는 거뭇한 물체가 고개를 든다. 고양이를 어깨에 태우고 그가 서가에 기대어 서서 시집을 읽고 있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금붕어들에게 먹이를 주다가 그가 있던 자리를 다시 한번 힐긋 돌아본다. -「까마귀 서점」 중에서
내가 혜주와 같이 살게 된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때마침 나의 원룸 계약이 끝났고, 그녀 또한 함께 살던 어머니가 지방으로 내려가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혜주는 나를 위해 15평짜리 구축 아파트를 새롭게 인테리어까지 했다. 내가 캐리어 두개를 끌고 현관문에 들어섰을 때, 그녀의 말을 증명하듯 집 안에서 도배지의 독한 풀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나는 알레르기성 비염 때문에 새집증후군에 민감했지만 그녀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괜히 그녀의 기분을 거스를 것까지 없다고 생각했다.
혜주는 자신의 아파트를 새장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때마다 그럼, 우린 뭐지?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의 말을 옳다고 존중하기로 했다. 물론 아파트의 소유주는 혜주였다. 집 안에 있는 모든 가구들도 그녀의 것이다. 모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와 모카는 혜주의 공간에 이케아 매장에서 구입한 옷장이나 소파와 같았다. DIY가구처럼 그녀가 원하는 형태로 앉거나 눕거나 서 있기만 하면 됐다.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나의 코가 도배지의 풀 냄새에 무뎌지듯, 나는 곧 혜주가 케어해주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모카를 위하여」 중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시내버스가 병오 앞에서 주춤거리더니 느릿느릿 지나갔다. 병오는 서울에서 택배기사를 하고 있다는 기현에게 매일 전화를 했다. 강아지가 태어났다고, 혼자서 하나로 마트에서 장을 봤다고, 혜인이 누나가 그림을 칭찬했다고, 미용사 자격증을 딴 누나가 기념으로 머리를 깎아줬다고. 매일 자랑을 해도 자랑할 거리가 많았다.
‘올해도 많이 바쁜가봐. 형도 우리가 보고 싶지. 누나가 형도 이 골짜기의 냄새가 그리울 거라고 했어. 난 잊어버릴까봐 형 얼굴 매일 그리고 있어.’
병오는 전화기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그는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승강장 의자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륜 전기 스쿠터에 시동을 걸었다. 스쿠터 트렁크에 실린 북어포가 몸을 뒤척였다. -「정거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