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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2828978
· 쪽수 : 392쪽
· 출판일 : 2025-10-02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뿌리 / 8
꾀꼬리 / 31
시루봉 / 54
고향집 / 78
태조산개나리꽃 / 126
백제 왕릉 / 153
당산바느질 / 206
불화살 / 232
참외 / 257
용구새 / 282
고구마와 호박죽 / 308
쌍무지개 / 331
얘기꾼의 발자국 / 358
[부록] 소설가 이광복(李光馥) 연보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는 세 살 때 (큰)아버지 내외분에게로 출계했다. 종가인 큰집에 종통을 계대해야 할 후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종가의 무후. 그 절박한 마당에 아버지 어머니께서 일생일대의 중대 결단을 내렸다. 친가 부모님은 둘째딸을 큰집으로 보낸 데 이어 나까지 어머니 젖을 떼자마자 입후, 즉 양자로 바친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졸지에 종가의 종손이 되어 누대 선조님의 제사를 모셔야 할 사손으로 자리매김했다. 운명이 바뀐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만, 철모르는 코흘리개 어린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 어머니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생이별이었다.
나는 유년 시절 (큰)아버지로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고, 석양국민학교(지금의 석양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너덧 살 때 한글을 깨치고 천자문을 떼었다. (큰)아버지께서는 그런 나에게 틈만 났다 하면 세보를 꺼내 놓고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가르쳐 주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때부터 위선과 보학과 집안 내력에 처음으로 눈뜬 셈이었다. 어느 날인가 (큰)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윤복아, 너는 어디를 가든 항상 한산이가라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우리는 시조 호장공으로부터 7세 되시는 목은 할아버지 자손으로 양경공파 후손이여. 사람이라면 반드시 제 뿌리를 알아야 하느니라. 니가 조금만 더 크면 목은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우리 선조님들이 얼마나 위대하신 어른들이신가를 저절로 알게 될 겨. 내 말 잊지 말거라.” (「뿌리」 중에서)
작년 여름이었다. 다시 원증산을 찾았다. 윗집 집터는 누군가가 왕창 밀어다 붙인 흙무더기로 뒤덮인 채 완전히 땅에 파묻혔고, 내가 부엌 모퉁이에 심었던 은행나무만 거목으로 자라 흙무더기 경계 지점에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울창한 가지마다 은행 열매가 포도 알처럼 다글다글 맺혀 있었고, 저 밑 수랑논에서부터 도라무텡이를 지나 채종말과 고추골에 이르는 용보들에는 거름을 듬뿍 머금은 벼가 거무룩하게 자라고 있었다.
내가 말랭이에 서서 동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때 시루봉 정상 쪽으로부터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온 노란 꾀꼬리 한 마리가 허공을 박차고 하늘 높이 치솟는 듯 하더니 은행나무 꼭대기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만감이 뒤죽박죽으로 교차하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꾀꼴 꾀꼴 꾀꾀꼴 꾀꼴 큰 소리로 무정한 노래를 불렀다. 때마침 당산 쪽에서는 산비둘기가 애절하게 울고 있었다.
잘 알다시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게 마련이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아우들이 경천동지할 대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기를 빌고 또 빌었다. 시루메, 즉 원증산은 몽매에도 잊지 못할 영원한 내 고향이었다. (「꾀꼬리」 중에서)
나는 그동안 향수에 젖을 때마다 줄곧 윗집이든 아랫집이든 사진 한 장 똑바로 촬영해 놓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아쉬워했다. 하기야 엄밀히 따지고 보면 내가 고향에 살 때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식구들은 사진 촬영보다 입에 풀칠하기가 더 다급했다. 사진을 확보해 놓았더라면 나중에라도 누군가 우리 후손이 아랫집과 윗집을 복원할 때 가장 근사하게 참고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자못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사실인즉 (큰)어머니와 누님과 내가 윗집 마당에 나란히 서서 촬영한, 노랗게 빛바랜 명함판 크기의 작은 사진이 딱 한 장 있기는 있었다. 그런데 어느 여성지 기자가 내 일대기를 기사화할 때 곧바로 돌려준다면서 그걸 챙겨가더니 그만 흐지부지 분실하고 말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재수 없으면 비행기 안에서도 독사 물린다는 말이 있지만, 무책임한 기자를 철석같이 믿고 희귀 자료를 내주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참화를 입었다. 나중에 듣자하니 그 기자 녀석은 자기네 집 족보까지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사진이나 영화를 관람하듯 꼼꼼히 회상하건대 우리 윗집의 구조는 아주 단조로웠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 딸린 맞배지붕의 말집이었다. 추녀를 집 전체에 삥 둘렀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부엌 쪽에만 추녀를 두르고 방 쪽에는 추녀를 두르지 않아 가옥 모양이 비대칭으로 되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외견상 궁색이 졸졸 넘쳐흘렀다.
그나마 부엌 쪽에 애써 천막처럼 추녀를 두른 것은 농기구와 그 밖의 잡다한 가재도구를 보관하는 헛간이 따로 없기 때문이었다. 그 추녀 밑 뒤쪽에는 눈비를 맞아서는 안 될 지게를 비롯하여 장작 고주박이 솔가리 깻대 콩깍지 등 바싹 마른 땔나무들이 쌓여 있었고, 그 앞쪽에는 수시로 꺼내 써야 하는 삼태기 키[箕] 메꾸리와 호미 낫 갈퀴 삽 쇠스랑 괭이 곡괭이 도끼 가래 넉가래 도리깨 홀태 따위의 몇몇 농기구들이 있었다. (「개나리꽃」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