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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책읽기/글쓰기 > 글쓰기
· ISBN : 9791192908298
· 쪽수 : 640쪽
· 출판일 : 2024-06-30
책 소개
목차
서론 7
1장 잘 쓴 글 25
2장 세상으로 난 창 61
3장 지식의 저주 119
4장 그물, 나무, 줄 157
5장 일관성의 호 271
6장 옳고 그름 가리기 359
감사의 말 576
용어 해설 580
후주 599
참고 문헌 615
도판 저작권 627
옮긴이 후기 629
찾아보기 632
리뷰
책속에서
옮긴이 후기에서
기계에게 의존할 수 없는 것
번역가들이 가끔 푸념처럼 서로 하는 말이 있다. 어떤 글이 정말 잘 쓰였는지 아닌지는 그냥 읽어서는 잘 모르고, 번역해 보아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책을 술술 읽어 내려갈 때는 참 잘 쓴 글인 것 같았는데 막상 번역하려고 하면 여기저기 불명확하거나 부정확한 문장에 턱턱 걸리는 경험을 나도 종종 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번역이 엄청나게 깊은 수준의 읽기라서 그럴 것이다. 글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문장도 구성도, 그 글을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다른 언어로 옮겨야 하는 번역가만큼 면밀하게 파고들어 감상하는 독자는 또 없다.
20년 가까이 100여 권의 영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나는 잘 쓴 글과 허술한 글과 언뜻 잘 쓴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번역해 보면 숭숭 구멍이 느껴지는 글을 다양하게 만났다. 잘 쓴 글은 무엇보다도 번역 과정이 명쾌하고 수월했던 기억으로 남는다. 그렇게 기억에 남는 글 중에서도 내가 첫손가락으로 꼽을 책은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한국어판이 1,000쪽이 넘을 만큼 두껍고 내용도 방대한데, 그것을 옮기는 반년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별다른 어려움도 없었다. 그것은 저자가 주제를 자신만만하고 명료하게 해설했기 때문이고, 긴 책의 적재적소에 사례와 통계를 배치하여 리듬감을 주었기 때문이고, 기초적인 차원에서 문법이 틀린 문장 따위도 없었기 때문이다. 번역가로서 경험을 걸고 말하는데, 이렇게 잘 씀으로써 번역가를 도와주는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니 스티븐 핑커가 글쓰기 지침서를 쓴 것은, 적어도 내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핑커는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에 기여하는 ‘어법 패널’의 의장이기도 했으니 자격은 충분하다.
『글쓰기의 감각』에서 핑커가 알려주는 것은 논픽션 글쓰기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스타일이다. 핑커는 글의 거시적 구성부터 미시적 문법 문제까지 두루 다룬다. 그중 어떤 글이 잘 쓴 글인지 보여 주고 왜 사람들이 나쁜 글을 쓰는지 분석한 1∼3장과 5장은 언어와 무관하게 모든 독자에게 도움이 될 내용이다. 구문과 단어를 다룬 4장과 6장은 영어에 해당하는 내용이라서 영어 글쓰기가 목적이 아닌 독자라면 건너뛰어도 좋지만, 중간중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조언이 있으니 가급적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특히 책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2장과 3장은 언어를 불문하고 세상의 모든 작가에게 강제로라도 읽히고 싶은 내용이다. 핑커는 가령 “수동태를 쓰지 마라.”라는 조언 같은 것을 절대적 진리로 주장하는 교조주의자가 아니고(이 대목에서 한국어 번역가인 나 또한 얼마나 속이 후련했는지!), 오히려 규칙과 관습에 얽매이는 원칙주의자가 좋은 글을 망친다고 보는 실용주의자이다. 또한 명쾌함을 지향한다고 해서 때로 화려하고 섬세하게 쓰지 못할 것은 없다고 말하는데, 다름 아닌 핑커 자신의 글이 그 좋은 예이다. 정말로, 『글쓰기의 감각』은 자신의 주장에 스스로 사례가 되어 보이는 책이다. 글쓰기 지침서도 재미있고 명쾌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 주는 책이다.
최근 인공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과 대형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이 급속하게 발전한 덕분에, 누구나 글쓰기에 관련된 갖가지 작업을 기계에 맡겨서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번역뿐 아니라 교정, 요약, 자료 탐색, 구성도 벌써 기계가 거들어 주고 있다. 이런 시대에 글쓰기를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한국어도 아닌 영어 글쓰기를? 하지만 직접 기계를 활용하여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동의할 텐데,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좋은 글인가?’ 하는 기준이다. 무엇이 좋은 글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만이 기계에게 좋은 글을 쓰도록 지시할 수 있고, 기계가 써낸 글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에서 마지막까지 타인에게 혹은 기계에게 의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글쓰기의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