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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91193027356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24-09-16
책 소개
목차
참 좋았더라
작가의 말
감사의 글
참고 문헌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담배를 두 개비 연거푸 피운 뒤, 연필을 고쳐 쥔 다음 그리기 시작한 것은, 사람도 아니고 배도 아니고 섬도 아닌 바다였다. 등대에 얼핏 비친 바다도 아니고, 어선이 지나간 뒤 물결과 함께 밀리는 바다도 아닌, 단잠에 빠졌다가 막 깨어난 바다. 핏발 선 눈을 닮고 억겁을 듣는 귀를 닮은 바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누군가에겐 전부를 내주는 바다. 일곱 번째 바다로 이끌 바다. 그물질하듯 매일 그릴 바다. 고흐의 밀밭으로 바뀌는 바다, 세 개의 십자가가 우뚝 선 루오의 골고다 언덕만큼 높은 바다, 드가의 춤이기도 하고 마티스의 음악이기도 하며 세잔의 원통과 원추와 구체(球體)이기도 한 바다. 그 모든 바다에 젖으면서 또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통영의 첫 새벽 바다.
이중섭은 잔부터 비운 뒤 담배를 물었다. 양 볼이 쏙 들어갈 만큼 깊이 한 모금 빨았다가 천장을 향해 길게 뱉 었다. 달을 가리키기라도 하듯 담배를 쥔 손으로 허공을 저어가며 말했다.
“너무너무너무 죽엇습네다. 사람만 죽은 거이 아니디요. 새들두 길바닥에 널렛디 않습네까? 서기포서도 부산서도 통영에 와서도 똑똑히 보앗디요. 새들이래 둥어니로 돌아가딜 않구 밤에도 날아댕기는 건 배가 고파섭네다. 오늘 배를 태우디 않으문 영영 쓰러져 죽을 것 같아서디요. 달밤에 먹을 걸 찾아 오가는 사람들이래 괴변이 아니라문, 달밤에 자질 않구 댕기는 가마구를 괴변이라 할 수 잇갓습네까? 달밤엔 사람 눈깔두 누렇구 가마구 눈깔도 누렇디요.”
김춘수가 한 문장으로 줄여 확인하듯 물었다.
“살라는 몸부림이다 이 말이지예?”
처음부터 다시 붉은 하늘을 그렸다. 지금까진 뜨거운 낮을 보내고 스러져가는 저물녘을 담으려 했다. 노을이 아무리 붉어도, 수평선 바로 아래엔 막막한 어둠이 뱀처럼 도사렸다. 허전하고 쓸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물녘을 동틀 녘으로 바꿨다. 시작하기 직전의 붉음이요, 점점 밝아지는 붉음이요, 채워가는 붉음이다. 몸도 마음도 차오를 때, 소의 뿔과 입술에도 힘이 실린다. 첫숨을 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