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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3044322
· 쪽수 : 156쪽
· 출판일 : 2025-07-10
책 소개
: 모든 종류의 ‘피지컬 음반’에 대한 기록
아무튼 시리즈 77번은 뮤지션 성진환의 『아무튼, 레코드』이다. 성진환 작가는 스윗소로우 멤버로 활동하면서 음악을 만들고 발표하는 삶을 오랫동안 살았다. 10여 년의 활동 후 한동안은 혼자서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만화를 그렸다. 이 모든 일들의 와중에서 그가 한 번도 쉬어본 일 없이 꾸준히 해온 것이 있다. 바로 누군가가 만든 음악을 좋아하고 즐겨 듣는 일이다. 그는 아직 언어를 구사하지 못할 때부터 음반이라는 물건에 집착했다.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후에는 카세트 레코더에 연결된 유선 헤드폰과 그걸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집에 있는 몇 개의 카세트테이프와 녹음기에 온 정신이 팔려 있던 아기 시절의 흥분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히 떠올릴 정도.
뮤지션이 되는 상상은 어렸을 때부터 종종 했다. 은밀하게 품어온 또 다른 장래 희망이 있었는데, 바로 음반 가게 점원이 되는 것이었다. 사십대가 된 지금 그는 오랜 시간 가장 좋아해온 음반 가게 ‘김밥레코즈’의 매장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날마다 실컷 음반을 만지고 음악을 듣는, 그가 꿈꾸어온 삶이다. 음반을 만드는 사람, 사서 듣는 사람, 그리고 파는 사람. 작가 성진환의 삶은 이 세 개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물건으로서의 음반”
: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혹은 설레면 버리지 않는다
『아무튼, 레코드』에는 무형의 음악이 유형의 물건에 기록된, 모든 종류의 피지컬 음반과 각 매체의 재생 기기에 대한 성진환의 애호와 기록이 담겨 있다. 그는 음반을 물건 자체로도 좋아한다. 언젠가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광풍이 불었을 때 그도 넘치는 물건들을 정리해보려고 시도했다. 집 안을 가장 많이 채우고 있는 음반들이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시간과 추억이 켜켜이 쌓인 음반들을 도무지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여전히 설렌다면 버리지 않겠다고.
『아무튼, 레코드』에서는 좋아하는 물건인 음반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관찰과 성찰이 돋보인다. 두 개의 톱니바퀴가 사이좋게 서로를 이끌거나 기다려주는 모습(카세트테이프)을 묘사하는 부분이라든가 ‘미래에서 온 외계 물질’을 처음 보고 살짝 충격받은 모습(시디)에서는 빙그레 웃음이 난다. 특히 엘피가 돌아가는 모습에 대한 그의 묘사는 아름답다.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들려오는 모든 순간 턴테이블의 바늘 끝은 정확히 그 순간의 소리가 새겨진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은 깊은 밤 산 속에서 무언가를 쫓는 표범처럼, 한 번도 쉬지 않고 지형을 따라 흔들리며 달린다. 그 흔들림, 그 길의 모양이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원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한 방향으로만 달리는 바늘이, 이환상적인 전체 여정 중의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는 언제나 확실하게 보인다. (42면)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것에 익숙한 이들에게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을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실물 음반의 면모가 그의 묘사를 통과해 신선한 환기력을 얻는다. 누군가가 만든 멋진 음악을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갈망의 시간이 길러낸 ‘좋은 눈’이다. 『아무튼, 레코드』의 ‘레코드’는 음악을 기록한 장치로서의 음반(record)을 말하기도 하지만 음악을 사랑한 시간과 그 산물인 추억의 기록(record)이기도 하다.
“누군가 음반들을 잔뜩 짊어지고 와서 밤새 음악이 끊기지 않게 틀어주는 기분”
: 쳇 베이커에서 조동익을 지나 클레어오까지
『아무튼, 레코드』는 당연히 읽는 책이다. 그렇다면 듣는 책이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음악을 찾아 듣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카세트테이프와 시디, 엘피를 향유하던 시절 자신이 사랑하며 들었던 음악과 뮤지션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제목과 이름들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추억과 에피소드에 연결된 이 리스트들을 스치듯 지나간 후에는 반드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하나하나 검색하고 들어보게 된다. 그리고 필요한지도 몰랐지만 이미 긴요해지고 만 ‘나만의 플레이 리스트’ 작성을 하느라 손길이 바빠진다. 특히 음반 수록곡 사이에 들어가는 간주곡처럼 곳곳에 포진한 “Interlude”는 ‘최근에 잘 산 카세트테이프 몇 개’라든가 ‘매장에서 일하며 가장 많이 추천한 음반’, ‘컴필레이션이라는 이름의 믹스테이프’ 등을 통해 플레이 리스트의 향연을 펼친다. 특히 컴필레이션 음반이 지니는 나름의 미덕을 칭찬하면서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음반들을 잔뜩 짊어지고 오늘 밤 우리 집에 와서 음악이 끊기지 않게 틀어주는 기분”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조금만 부지런을 떤다면 『아무튼, 레코드』가 바로 이런 기분을 선사해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아직도 음반이 팔리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작가 성진환이 들려주는 대답이기도 하다. 이 대(大)스트리밍의 시대에 굳이 피지컬 음반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넓고 뜨겁게 퍼져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사랑하는 음악만큼은 조금 번거롭게, 더 정성을 들여 듣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목차
이 음악은 당신의 것입니다
설레면 버리지 않는다
두 개의 톱니바퀴
Interlude 최근에 잘 산 카세트테이프 몇 개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을 눈으로 본다는 것
시디피 블루스
시디 시대는 다시 온다
Interlude 최근에 잘 산 시디 몇 장
반갑고 조심스러운 일
Interlude 매장에서 일하며 가장 많이 추천한 음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음반을 주고받는다는 것
Interlude 최근에 한 음반 선물
한 사람을 위한 마스터링
Interlude 컴필레이션이라는 이름의 믹스테이프
내 인생의 음반 가게들
저자소개
책속에서
오늘도 나는 수많은 나를 만나러 직장에 간다. 엄마 아빠를 따라와서 손도 잘 닿지 않는 진열대 사이를 서성이다 턴테이블 위 빙글빙글 돌아가는 음반에 시선을 빼앗기는 어린이. 딱 한 장만 사야 해서 몇 시간을 고민하고, 그럼에도 돈이 모자라 애가 타는 청소년. 희귀한 음반도 아닌데 눈에 보이는 곳에 놓여 있다는 것만으로 흥분하는 젊은이들.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상대의 취향을 파악하고 은근슬쩍 자기 취향을 어필하는 연인들. 퇴근 후에 가끔 들러 천천히 여러 음반들을 꺼내 만져보고 그냥 조용히 돌아가는 직장인.
언제 봐도 대단한 디자인이다. 손에 기분 좋게 잡히는 절묘한 크기와 두께, 둥글게 마감된 네 모서리, 가운데 나 있는 작은 창문, 그 안에 커튼처럼 감겨 있는 반짝이는 흑갈색 테이프. 손가락 끝이 살짝 들어가는 두 개의 동그란 구멍 안쪽에는 앙증맞은 톱니가 여섯 개씩 달려 있다. 케이스를 열고 꺼내는 동안 안쪽의 부품들이 달그락 흔들릴 때, 플레이어에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갈 때, 찰칵 문을 닫을 때, 달칵 버튼을 눌러 재생하고 되감을 때… 모든 순간 모든 감각이 이 정도로 만족스럽게 설계된 물건이 또 있을까.
테이프가 늘어지면 소리도 늘어지고, 쭈글쭈글해지면 소리도 쭈글거린다. 소리가 변했다면 오직 나로 인한 것,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느낌이 좋다. 단지 추억 때문만이 아니고, 늘어지고 흔들리는 소리 자체가 내 귀에는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음악 재생 중 거슬리는 소리들은 따로 있다. 에어팟에 이상이 생겼을 때 들리는 지직거리는 노이즈, 정성을 다해 스팸 문자를 읽어주는 시리, 무선 헤드폰의 배터리가 부족할 때 연거푸 들리는 ‘리챠-지 헤드셋’ 같은 것들. 가끔 블루투스나 인터넷 연결 문제로 음악이 뚝뚝 끊기기라도 하면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런 반면 카세트테이프는 꾸루루룩 하다가 씹혀도 그냥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