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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비 오는 날

손창섭, 강신재, 이기영, 김남천, 현덕 (지은이)
포레스트위즈덤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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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비 오는 날 
· 분류 : 전자책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 ISBN : 9791193805077
· 출판일 : 2024-02-15

목차

비 오는 날
잉여 인간
해방촌 가는 길
홍수 이기영
맥 김남천
경칩
남생이
나비를 잡는 아버지

저자소개

강신재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1949년 단편 소설 「얼굴」, 「정순이」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1959년 단편 소설 「절벽」으로 한국문인협회상을 수상했다. 1967년 장편 소설 『이 찬란한 슬픔을』로 여류문학상을 받았고, 1984년에는 장편 소설 『사도세자빈』으로 중앙문화대상, 1988년에는 같은 작품으로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예술원의 정회원이자 한국소설가협회 대표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1년 숙환으로 별세했다. 『젊은 느티나무』, 『파도』, 『황량한 날의 동화』, 『밤의 무지개』, 『간신의 처』, 『사랑의 아픔과 진실』 등의 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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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천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1년 평남 성천군에서 출생하여 1929년에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도쿄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였고, 1930년 카프 동경지부에 발행한 ≪무산자≫에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1년에 제적되었다. 1931년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김기진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하고,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한 바 있다. 1931년에 제1차 카프 검거사건 때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가담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출옥 후에 감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단편 「물」(1933)을 발표하고 문학적 실천에서의 계급적 주체 문제를 놓고 임화와 논쟁을 벌였다.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사건에도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5년 임화·김기진 등과 함께 카프 해소파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장편 ≪대하≫(1939), 연작인 ≪경영≫(1940)과 ≪맥≫(1941) 등을 발표했다. 8.15 광복 직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하여 좌익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던 중, 1947년 말 경 월북하여 해주 제일인쇄소의 편집국장으로서 남조선로동당의 대남공작활동을 주도하였으며, 한국 전쟁에도 조선인민군 종군 작가로 참전했으나, 1953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로동당에서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김남천도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1953년이나 1955년에 사형당했다는 설, 1977년까지도 생존해 있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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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 (글)    정보 더보기
1909년 2월 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현동철(玄東轍)과 전주 이씨의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현경윤(玄敬允)이고 본관은 연주(延州)다. 제일고보 학적부에는 아버지의 직업은 상인이고, 출신 성분은 양반이며, 본적은 경성부 통의동 38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현덕의 조부 현흥택은 민영익의 수행인 자격으로 1883년 최초의 대미 외교 사절단 보빙사에 참여했고, 1895년에는 시위대 연대장에 임명된 바 있다. 또한 그는 정동구락부의 일원으로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다. 현덕이 쓴 <자서 소전>에는 출생 당시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았으나, 그의 출생 후 가세가 기울어 사글세를 면하지 못했고, 부모님은 불화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사업의 꿈을 포기할 줄 몰랐던 아버지 탓에 살림은 어머니가 도맡아야 했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이사 횟수가 이십여 회에 달했으며, 가족이 각자도생으로 헤어지길 수삼 회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인천 가까운 대부도(大阜島)의 친척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현덕은 1923년 인천의 대부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1924년 중퇴하고 중동학교 속성과 1년을 다녔다. 1925년 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그해에 중퇴했는데, 학적부에는 전체 수업 일수 245일 가운데 165일을 결석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 주소는 경성 관수동 45번지였다.현덕은 192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달에서 떨어진 토끼>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반적으로 현덕의 등단작은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가작 입선한 <고무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의 등단 지면은 ≪조선일보≫ 신춘문예다. 이 무렵 현덕은 수원 발안 근방의 매립 공사장에서 토공 생활을 했고, 이후 현해탄을 건너가 교토, 오사카 등지를 떠돌며 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흙 바구니를 짊어지지 못하고 쓰러지는 통에 공사장에서 쫓겨났고, 그 일을 계기로 문학의 길에 대한 꿈을 현실화하기에 이르렀다. 1936년 막노동판을 떠돌다가 문학에 뜻을 둔 후 작가 김유정을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현덕은 <자서 소전>의 말미에서 김유정과의 관계를 “지기 고 김유정 형을 얻어 문학을 향한 뜻을 굳게 하고 그 길을 밟던 중, 금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그 길에 자신 같은 것을 가져보며 현재에 이르렀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남생이>가 당선되어 정식 등단했으며, <경칩>(1938), <층>(1938), <두꺼비가 먹은 돈>(1938)을 연이어 발표했다. 1939년 1월 월간 ≪조광≫에 실린 <신진 작가 좌담회>에서 현덕은 등단작 <남생이>가 인천에 있을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 사고(社告)를 보고 자신의 역량을 시험해 보기 위해 쓴 작품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로 미루어 당시 현덕의 거주지는 인천이었고, <남생이>의 배경 또한 인천 해안의 빈민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덕은 1939년 인천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동대문 부근의 빈민촌인 경성부 창신정 600의 9번지에 거처를 정했고, 이해에 <골목>(≪조광≫), <잣을 까는 집>(≪여성≫), <녹성좌>(≪조선일보≫)를 발표했다. 이 시기에 발표된 그의 수필과 소설에는 변변한 생업마저 없었던 청춘의 불행한 운명과 극도로 위축된 인텔리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방 이후 현덕은 임화와 교제하며 문단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부, 아동문학부, 대중화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고, 소설집 ≪집을 나간 소년≫(아문각), 동화집 ≪포도와 구슬≫(정음사) 등을 간행했다. 1947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의 편집 겸 발행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서울지부 소설부 위원장을 지냈다. 그리고 소설집 ≪남생이≫(아문각), 동화집 ≪토끼 삼형제≫(을유문화사)를 출판했다. 현덕은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했다. 호적부에는 1951년 9월 27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38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51년 북한에서 여러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월북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현덕은 1962년 북한에서 한설야가 숙청될 때 그의 추종 세력들과 함께 숙청되었고, 이후의 삶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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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2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 1935년 만주를 거쳐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학으로 니혼대학에 들어갔으나 중퇴 후 초등학교 교원, 잡지 편집원 등을 전전했다. 1946년 평양으로 돌아왔다가 1948년 월남했으며, 1949년 연합신문에 「얄궂은 비」를 연재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1952~1953년에 『문예』지에 「공휴일」과 「비오는 날」 등의 단편소설이 추천되어 활발한 집필활동을 펼쳤다. 1955년 「혈서」로 현대문학상을 받고, 1959년 「잉여인간」으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1960년대 초반부터 작품활동이 뜸해지다가 1973년 홀연히 일본으로 떠났다. 1976~1977년 한국일보를 통해 장편소설 『유맹』과 『봉술랑』을 연재하였으나, 이후 오랫동안 소식이 두절되었다. 그후 아내와 함게 도쿄에서 거주해 오다가 2010년 6월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단편소설 「사연기(死緣記)」「치몽(稚夢)」「신의 희작(戱作)」 「육체추(肉體醜)」 「흑야(黑夜)」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낙서족(落書族)』 『부부』 『인간교실』 『길』 『삼부녀』 『유맹(流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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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지은이)    정보 더보기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천안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몰락해 가는 빈궁한 가정환경,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머니로 인한 침울한 아동기를 고전소설과 신소설을 탐독하며 보냈다. 1906년 아버지 이민창과 안기선 등이 세운 천안 사립영진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1908년에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조혼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기영의 작품 속에서 조혼의 폐습을 비판하고 자유연애를 지향하는 내용이 빈번한 이유가 되었다. 소학교 졸업 후에 한동안 방랑과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1918년 귀향하여 논산 영화여학교에 근무했다. 3·1운동을 계기로 현대 문학예술을 지향하게 되었으며,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고학하였고, 유학생 모임에서 포석 조명희를 만났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 1924년 ≪개벽≫ 현상 모집에 단편 <옵바의 비밀편지>가 3등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25년에 조명희의 주선으로 ≪조선지광≫의 편집 기자가 되었고, 같은 해 8월 최서해, 이상화, 송영, 한설야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을 창건했다. 그 무렵 신여성 홍을순과 새 가정을 꾸렸으며, 이후 계속 함께했다. 본격적인 문학 활동과 카프 가맹이 거의 동시에 이뤄짐으로써 이기영의 작품은 창작 방법과 세계관에 있어서 계급주의를 표방하였다. <농부 정도룡>, <조희 ?는 사람들>, <홍수> 등의 단편소설과 이후 발표되는 중·장편 소설들을 통해 관념 편향적인 계급주의 지도 이론을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이기영은 명실공히 카프 최고의 작가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기영은 카프 중앙위원 및 출판부 책임자를 지내던 중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로 구속되었다가 2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때 구상한 중편소설 <서화>(1933)로 호평을 받았으며, ≪고향≫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고향≫은 충남 천안의 원터마을을 무대로 일제강점기 식민지적 근대화에 따라 붕괴되고 재편되는 농촌의 모습을 고도의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려내 한국 근대소설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로 다시 구속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6년 소시민 지식인의 과대망상증을 통해 당대 사회제도의 불합리성을 폭로하는 장편 풍자소설 ≪인간수업≫을 발표했고, 10월에는 ≪고향≫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시국인식간담회에 참석하거나 조선문인보국회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창씨개명과 일어 집필, 강연 요구를 거부하다가 1944년, 강원도 내금강으로 소개(疏開)하여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다. 해방을 맞이해 상경한 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연맹을 주도했으며, 1946년 2월에 월북했다. 노년기까지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 등 북한에서 문학예술 분야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으며 장편소설 ≪땅≫(1948∼1949), ≪두만강≫(1954∼1961) 등을 집필했다. 1984년에 사망하여 평양 신미동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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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정보 제공 : Yes24(www.yes24.com), 알라딘(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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