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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D 세트 - 전12권 (모의고사 출제 작품)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32039428
· 쪽수 : 5532쪽
· 출판일 : 2022-01-20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32039428
· 쪽수 : 5532쪽
· 출판일 : 2022-01-20
책 소개
각종 모의고사와 논술고사에서 출제된 작품들로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학사적 가치가 빛나는 작품들이 한데 모였다. 최근 특별히 더욱 주목받기 시작한 백신애, 김명순, 나혜석 등의 여성 작가 작품들도 담겼고 한국 현대희곡을 대표할 만한 앤솔러지 등을 포함하여 총 12편이 묶였다.
목차
비 오는 길
비 오는 날
흙
까마귀
소년의 비애
맥
추월색
유예
제1과 제1장
한국 현대희곡선(개정판)
혼명에서
근대여성작가선
저자소개
김남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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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평남 성천군에서 출생하여 1929년에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도쿄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였고, 1930년 카프 동경지부에 발행한 ≪무산자≫에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1년에 제적되었다. 1931년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김기진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하고,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한 바 있다. 1931년에 제1차 카프 검거사건 때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가담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출옥 후에 감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단편 「물」(1933)을 발표하고 문학적 실천에서의 계급적 주체 문제를 놓고 임화와 논쟁을 벌였다.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사건에도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5년 임화·김기진 등과 함께 카프 해소파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장편 ≪대하≫(1939), 연작인 ≪경영≫(1940)과 ≪맥≫(1941) 등을 발표했다.
8.15 광복 직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하여 좌익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던 중, 1947년 말 경 월북하여 해주 제일인쇄소의 편집국장으로서 남조선로동당의 대남공작활동을 주도하였으며, 한국 전쟁에도 조선인민군 종군 작가로 참전했으나, 1953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로동당에서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김남천도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1953년이나 1955년에 사형당했다는 설, 1977년까지도 생존해 있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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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엽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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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자 시인, 수필가. 1896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났다. 진남포 삼숭보통학교, 서울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 동경 영화학교英和學校에서 수학했다.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일엽一葉은 아호이자 법호이며, 법명은 하엽荷葉, 도호는 백련도엽白蓮道葉이다. 1920년 여성들이 주체가 된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평론 <우리 신여자의 요구와 주장> <여자의 자각> 등과 소설 <계시啓示> <나는 가오> <자각自覺> 등을 비롯해 시, 수필 등을 다수 발표했다. 제1세대 여성 문인으로서, 김명순, 나혜석 등과 함께 여성의 의식 계몽을 위한 글쓰기와 강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불교에 귀의하고 만공선사를 만나 1933년 출가했으며, 이후 비구니 도량인 수덕사 견성암에서 참선 수행에 전념했다. 만년에 대중 포교를 위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 《청춘을 불사르고》(1962)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1964) 등을 집필했다. 1971년 1월 28일(음력 1월 2일) 수덕사에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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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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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지식인 중 한 명으로, 화가이자 작가, 여성운동가, 독립운동가로서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라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며 한국 여성으로서 최초로 여러 영역에서 선구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전통적인 여성상에 대한 도전과 사회적 억압 속에서도 자아를 찾으려 했던 그녀의 삶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문필가로서 나혜석은 ‘신여성’ 담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조선일보》《동아일보》《여자계》《신여자》 등 각종 신문과 잡지에 여성의 권리와 해방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혼고백서」「부인문제와 결혼관」「여자도 사람이다」와 같은 저술을 통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임을 역설했다. 당시 그녀의 글은 보수적인 조선 사회에서 도전적이고 파격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녀의 그림과 글은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의 억압된 현실과 그 속에서의 저항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나혜석은 끝까지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개인의 비극적인 삶에도 불구하고 여성 해방과 민족 해방의 가치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혜석의 정확한 사망 시기와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삶은 비극과 투쟁, 창조와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후에도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그녀는 198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의 부흥과 함께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나혜석은 한국 근대 여성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미술, 문학, 사회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보여준 그녀의 활동은 당시 조선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으며, 이후 한국 여성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이제 ‘신여성’이라는 말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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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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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895년(17세) 큰아버지인 안경수의 도움으로 관비 유학생 으로 선발되어 일본 게이오의숙에서 수학했고, 곧 도쿄전문학교로 옮겨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899년(21세) 귀국한 직후 박영효와 관련된 역모 혐의에 얽혀 투옥되었고, 1904년(26세) 종신 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만 3년간 전라남도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투고와 번역에 투신 했다. 1907년(29세)년 유배에서 풀려나 상경한 이후 「정치원론」, 「외교통의」, 「연설법방」 등 다양한 책을 연달아 출간했다. 또한 학교 강단에서 정치와 상업을 강의하고, 여러 사회단체와 학회에 참여하며 국민계몽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듬해 관직에 나서면서부터 이전 의 행보와 멀어졌고, 1911년(33세)에는 청도군의 군수직을 지냈다. 1913년(35세) 군수직을 청 산하고 학교로 돌아와 정치학과 경제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5년(37세) 「공진회」를 출간 했고, 안성으로 잠시 낙향했다가 1920년(42세) 아들의 교육을 위해 다시 상경하여 경제 관련 글쓰기 활동을 재개했다. 1926년(48세)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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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백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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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다섯> 당선
<파수꾼> <봄날> <영월행 일기> <날아다니는 돌> 등 40여 작품 공연
서울예술대학 극작과 교수 역임
수상
서울극평가그룹상, 동아 연극상,
대한민국 문학상,
서울연극제 희곡상,
백상 예술대상 희곡상,
대산 문학상, 서울시 문화상
희곡집
이강백희곡전집 1권~9권(평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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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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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매우 중요한 작가이면서,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자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구한말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일찍 부모를 여의고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유학을 통하여 근대사상과 문학에 눈뜨고 이를 한국적 사상 및 문학 전통에 접맥시켜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열어나갔으며, 한국전쟁 와중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붓을 놓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놀라운 창작적 삶을 이어간 작가였다.
그는 『무정』, 『재생』, 『흙』, 『유정』, 『사랑』 등으로 연결되는 본격 장편소설들을 통하여 한국 현대소설의 ‘제1형식’을 창출하였고,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한글 신문과 『조선문단』, 『동광』 등의 한글 잡지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문필 활동을 펼침으로써 현대 ‘한국어 문학’의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그는 『마의태자』, 『이차돈의 사』, 『단종애사』, 『이순신』, 『세조대왕』, 『원효대사』, 『사랑의 동명왕』 등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왕조에 이르는 시대적 사건과 인물을 소설화함으로써 민족적 위기의 일제강점기에 역사의 기억을 소설의 장에 옮겨 민족적 ‘자아’를 보존하고자 했다.
요컨대, 그는 한국 현대소설의 성립을 증명한 『무정』의 작가요, 도산 안창호의 유정 세계의 꿈을 이어받은 사상가요, ‘2·8 유학생 독립선언’을 주도하고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 가담한 민족운동가요, 민족적 ‘저항’과 ‘대일협력’의 간극 사이에서 파란만장하고도 처절한 생애를 살아간, 험난한 시대의 산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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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삼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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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 연극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극작가이자 영문 번역가. 동국대학교 영문과 교수를 지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연극학과 대학원에서 연극이론과 희곡창작을 공부했다. 귀국 이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재직했으며 1966년 뉴욕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1969년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정년퇴직까지 재직했다. 1960년 『사상계』에 단막극 〈원고지〉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국물있사옵니다〉, 〈30일간의 야유회〉, 〈막차 탄 동기동창〉, 〈어떤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기에〉 등 60여 편의 희곡을 발표하고 공연했다. 또한 『서양연극사』, 『연극개론』 등 연극 이론서를 집필하고 15편 이상의 영미 희곡을 번역해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국민훈장 모란장, 옥관문화훈장, 대한민국예술원상, 대산문학상(희곡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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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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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작가’라 불리는 이무영(李無影, 1908~1960)은 한국 현대 소설사에서 농민, 농촌의 테마를 가장 먼저 창작 현장으로 이끌어낸 문제적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소년기를 충북에서 보낸 그는 1920년 서울에 오면서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문학에의 큰 뜻을 품고 시작한 일본 유학에서 그는 가토오 다케오에게 문학 수업을 받았다. 귀국한 이후 신문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소설가, 극작가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본격적으로 농민 소설을 쓰면서는 농부들의 세계를 유머러스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농촌 소설의 선구자’라고 불렸다. 한편 1943년 친일 소설 「토룡」과 「향가」 발표, <매일신보>에 친일 논설을 실은 행적 등으로 2002년 민족단체가 발표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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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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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오몽녀」, 「아무일도 없소」, 「돌다리」 등을 저술한 소설가
아버지 이문교는 개화파 지식인으로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 근무한 지방관원이었는데, 당시 한말의 개혁파의 운동에 가담하였던 듯 수구파에 밀려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망명하다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이태준은 어려서부터 어렵게 수학하였다.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그 학교의 교원이었던 이병기(李秉岐)의 지도를 받아 고전문학의 교양을 쌓았다. 그런데 학교의 불합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한 결과 퇴교를 당하였다. 1926년 일본 도쿄에 있는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서 수학하다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29년에 개벽사(開闢社) 기자로 일하였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이효석(李孝石)·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유치진(柳致眞) 등과 결성하였다.
이어 순수문예지 『문장(文章)』(1939.2∼1941.4.)을 주재하여 문제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여 문단에 크게 기여하였다.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1925)를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또, 「아무일도 없소」(東光, 1931.7.)·「불우선생(不遇先生)」(三千里, 1932.4.)·「꽃나무는 심어놓고」(新東亞, 1933.3.)·「달밤」(中央, 1933.11.)·「손거부(孫巨富)」(新東亞, 1935.11.)·「가마귀」(朝光, 1936.1.)·「복덕방(福德房)」(朝光, 1937.3.)·「패강냉(浿江冷)」(三千里文學, 1938.1.)·「농군(農軍)」(文章, 1939.7.)·「밤길」(文章, 1940·5·6·7합병호)·「무연(無緣)」(春秋, 1942.6.)·「돌다리」(國民文學, 1943.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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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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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11. 15. 전라남도 목포 출생
2006. 6. 6. 사망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 학사
1955년 신춘문예 희곡 '밀주' 가작 입선으로 데뷔
_수상
1998 서울시 문화상
1993 이해랑연극상
1991 대한민국문학상
1982 대한민국예술원상
1981 대한민국 연극제 희곡상
1970 대한민국문화예술상
한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희곡작가이자 방송드라마 작가로, 극단 산하 대표,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사단법인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서울극작가그룹 회장, 청주대학교 교수, 서울예술전문대학 극작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희곡 작품으로 <귀향>, <산불>, <갈매기 떼>, <청기와 집>, <학이여, 사랑일레라>, <옥단어> 등이 있고, 주요 방송드라마로 <어둠 속에 피는 꽃>(1959), <물레방아>(1970), <전원일기>(1980), <드라마게임>(1984), <아리랑>(1994) 등이 있다. 2020년 그의 희곡ㆍ방송극ㆍ무용극ㆍ창극ㆍ뮤지컬ㆍ자서전ㆍ수필ㆍ논문ㆍ평론 등을 망라한 『차범석 전집』(전12권)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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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익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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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일본에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1936년 「짐」을 발표하고 1939년에는 「빛 속에」를 발표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대표작으로 「빛 속에」 『낙조』 「천마」 『향수』 『집』 등이 있다. 1945년 일본의 지배에서 조국이 해방되고 나자 그는 북한으로 가서 문단 활동을 활발히 벌인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 그는 조선인민군의 종군기자가 되었지만 같은 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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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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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법대에서 수학했다(2017년 명예졸업). 1959년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이 『자유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1977년부터 2001년 5월까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 집필과 후진 양성에 힘써왔다. 『광장/구운몽』 『회색인』 『서유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하늘의 다리/두만강』 『우상의 집』 『총독의 소리』 『화두』 등의 소설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집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에 관한 명상』 등을 출간했다. 동인문학상(1966),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1977), 중앙문화대상 예술 부문 장려상(1978), 서울극평가그룹상(1979), 이산문학상(1994), 박경리문학상(2011) 등을 수상했다. 『광장』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으로, 『회색인』이 영어로,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영어와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 간행되었다. 2018년 7월 별세했다. 사후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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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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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개화 노선을 지향한 이인직(李人稙, 1862∼1916)과 달리 애국 계몽 노선을 표방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10대 손으로, 이철용(李哲鎔)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열재(悅齋), 이열재(怡悅齋), 동농(東濃)이며, 필명은 선음자(善飮子), 하관생(遐觀生), 석춘자(惜春子), 신안생(神眼生), 해관자(解觀子), 우산거사(牛山居士) 등을 사용했다.
1906년 11월부터 잡지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에 소설 《잠상태(岑上苔)》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주목되는 작품인 《자유종(自由鐘)》(1910)은 봉건 제도에 비판을 가한 정치적 개혁 의식이 뚜렷한 작품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교육의 고취, 사회 풍속의 개량 등 계몽 의식이 두드러진다.
처첩 문제, 계모의 박해 등을 보여 주는 《빈상설(?上雪)》(1908)·《춘외춘(春外春)》(1912)·《구의산(九疑山)》(1912)이나 미신 타파를 내세운 《구마검(驅魔劍)》(1908), 일반적인 젊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의 사연에 중점을 둔 《화세계(花世界)》(1911), 《원앙도(鴛鴦圖)》(1911), 《봉선화(鳳仙花)》(1913) 등 36편의 작품을 발표해 신소설 최고의 작가로 평가된다. 모두 봉건 부패 관료에 대한 비판, 여권 신장, 신교육, 개가 문제, 미신 타파 등의 새로운 근대 의식과 계몽 의식을 담고 있다.
특히 1912년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토끼전》 등의 판소리를 명창 박기홍(朴起弘) 조(調)나, 심정순(沈正淳)의 창(唱)을 듣고 각각 《옥중화(獄中花)》, 《강상련(江上蓮)》, 《연의 각(燕의 脚)》, 《토의 간(兎의 肝)》 등으로 산정(刪正)해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고 단행본으로도 출판해 ‘활자본 고소설(이야기책)’의 유행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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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찬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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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호는 해동초인(海東樵人), 동초(東樵). 1881년 음력 8월 16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언론인인 영년(永年)이며, 어머니는 청송 심씨이다.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여 사서삼경을 배우고, 1897년 아버지가 광주에 설립한 시흥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한 뒤 서울로 올라와 관립한성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07년에 중국 상해에서 발행한 소설전집 《설부총서》를 번역한 뒤 현대소설의 토대가 된 신소설 창작에 몰두하여 〈자선부인회잡지〉 편집인과 〈신문계〉 〈반도시론〉 등의 기자를 역임하고, 《추월색》 《안의 성》 《금강문》 《도화원》 《능라도》 《춘몽》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발표한 작품들은 주로 민족의식이나 자주독립 등의 정치적인 면보다 기구한 남녀의 사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애정문제 · 신교육사상 · 민중의 반항 · 도덕관념 등을 내세워 시대의식을 반영하여 당대 신문학 개척에 공헌한 이인직, 이해조 등과 함께 선구자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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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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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 1935년 만주를 거쳐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학으로 니혼대학에 들어갔으나 중퇴 후 초등학교 교원, 잡지 편집원 등을 전전했다. 1946년 평양으로 돌아왔다가 1948년 월남했으며, 1949년 연합신문에 「얄궂은 비」를 연재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1952~1953년에 『문예』지에 「공휴일」과 「비오는 날」 등의 단편소설이 추천되어 활발한 집필활동을 펼쳤다.
1955년 「혈서」로 현대문학상을 받고, 1959년 「잉여인간」으로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1960년대 초반부터 작품활동이 뜸해지다가 1973년 홀연히 일본으로 떠났다. 1976~1977년 한국일보를 통해 장편소설 『유맹』과 『봉술랑』을 연재하였으나, 이후 오랫동안 소식이 두절되었다. 그후 아내와 함게 도쿄에서 거주해 오다가 2010년 6월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단편소설 「사연기(死緣記)」「치몽(稚夢)」「신의 희작(戱作)」 「육체추(肉體醜)」 「흑야(黑夜)」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낙서족(落書族)』 『부부』 『인간교실』 『길』 『삼부녀』 『유맹(流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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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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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롤랑의 <민중예술론>을 읽고 연극에 뜻을 둔 뒤 귀국해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를 조직해 신극 운동을 벌였다. 일제 탄압으로 극예술연구회가 해산되자 1941년에는 극단 현대극장(現代劇場)을 조직, <흑룡강(黑龍江)>(1941), <북진대(北進隊)>(1942), <대추나무>(1942) 같은 어용극을 직접 쓰기도 했다. 광복 직후에는 활동이 뜸하다 1947년 봄부터 연극계 전면에 나서 민족극을 주도했다. 이해랑(李海浪) 등을 내세워 극단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를 조직했고, 한국무대예술원을 창설해 초대 원장(1947)을 지냈다. 1950년에 국립극장이 창설되자 초대 극장장으로 취임했고, 자작극 <원술랑>으로 개관 기념 공연을 가졌다. 6·25가 발발한 뒤에는 은거하면서 희곡 창작에만 전념했다. 주요 희곡은 <토막(土幕)>(1932), <버드나무 선 동네 풍경>(1933), <소>(1934), <마의태자>(1937), <자명고>(1947), <한강(漢江)은 흐른다>(1958)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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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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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했으며, 해방 후 월남해 용산중학교에 재학했다. 졸업 후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입학 직후 터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학도병으로 참전한다. 부산에 서울대학교 가교사가 생긴 이후 복교하고, 문학 동인 ‘구도’에 참여한다. 1952년 극협에서 주관한 장막극 공모에 희곡 <녹쓰는 파편>이 당선된다. 그 뒤 유치진의 지도를 받으면서 잠시 희곡 창작을 시도하지만, 자신의 희곡이 실제로 상연되는 것을 보고 실망을 느낀 나머지 소설로 전향한다.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예>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해 이후 1966년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인다. 대학 졸업 후 한동안 공보처에서 일하다가 언론인으로 변신한다. 4·19를 다룬 미완 장편 ≪무명기≫에는 기자로서 그가 겪은 체험들이 반영되어 있다. 1966년 이후에는 작가로서의 활동보다는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에 더욱 치중한다. 1974년 단편 <모멸>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재기를 의욕적으로 노리기도 했으나,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1981년 단편 <산>을 마지막으로 발표한 뒤, 1985년 지병인 간경화가 악화해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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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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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한문을 수학한 후 경북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고, 2년 동안 보통학교 교원을 지내다 잡지사 기자로 전직했다. 이 무렵 조선여성동우회·경성여자청년동맹 등에 가담하여 여성운동을 벌였다. 1929년 박계화란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어 데뷔했으며, 신춘문예로 등단한 첫 여성 작가가 되었다. 식민지 조국을 벗어나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는 꺼래이(고려: 한국인)들의 고초를 그린 「꺼래이」(1933), 극심한 가난 속에 가정을 꾸려나가는 매촌댁의 애환을 그린 「적빈赤貧)」(1934),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 뒤 미쳐버린 여인의 한탄을 담은 「광인수기」(1938) 등이 대표작이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는 「채색교彩色橋」 「낙오落伍」 「정현수鄭賢洙」 「정조원貞操怨」 「호도糊途」 「소독부小毒婦」 「혼명混冥에서」 「아름다운 노을」 등이 있다. 5년여의 기간 동안 수십 편의 소설과 수필 및 기행문 등을 남겼으나 1939년 6월 23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백신애문학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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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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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의 대부분을 원산에서 보내다가 1929년 서울로 상경하여 잡지 『신여성』의 기자로 활동했다. 1934년 『중앙』에 단편 「가등」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소설 「계산서」 「매소부」 「탕자」 「처의 설계」 「창」 등을 비롯해 수필, 평론, 콩트 등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도 활동했다. 1946년 7월경 남편 박영호와 함께 월북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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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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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1920년 도쿄 유학생, 고학생 모임인 동우회에 참여하였고, 귀국 후 1925년 목포에서 문학 동호회 ‘5월회’를 조직하였다. 희곡 「정오」 「이영녀」 「두더기 시인의 환멸」 「난파」 「산돼지」 등을 집필하였다. 1926년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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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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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인천에서 자라 서울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36년 ≪조선문학≫에 단막극 <산허구리>를 발표한 이후 1939년 단막극 <동승>으로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했고, 1940년에 <해연>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정식 데뷔했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 연극을 다수 창작했다. 해방 직후에는 조선연극동맹에서 활동하면서 <기미년 삼 월 삼 일>, <고목>, <태백산맥> 등을 발표해 이 시기 대표적인 극작가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 월북했다가 1950년 전쟁 중에 35세로 사망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번안과 각색을 포함해 장·단막 모두 24편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는 <동승>, <무의도 기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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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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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서울고를 거쳐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요한을 찾습니다>가 당선되면서 극작 활동을 시작했다. 친숙한 일상이 은폐하고 있는 낯설고 공포스러운 어떤 국면과 폭력 문제를 주로 다뤄 왔다. 1978년 제1회 서울극평가그룹상, 1979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고, 1984년에는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0.917>, <카덴자>, <불가불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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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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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맹진사댁 경사」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 「해녀 뭍에 오르다」 「한네의 승천」 등을 발표했고, 시나리오 「시집가는 날」로 아시아영화제 최우수희극상을 수상했다. 1952년 월간 『문학예술』 주간을 역임했으며, 197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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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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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1937년 『조선문학』에 단편 「일요일」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여성해방문학을 주장하는 평론을 꾸준히 발표했으며, 해방 후 함경남도 원산에서 살다가 1947년 무렵 평양으로 이사했다. 소설 「일요일」 「이름 짓기」 「들국화」 「딸과 어머니와」 등을 비롯해 수필, 평론, 콩트 등 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1959년 『인민조선』에 발표한 「금 목걸이」를 끝으로 이후에 발표한 글들은 아직 찾을 수 없다. 북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 남편과 함께 축출되어 기계 운전기사로 일하면서도 단칸방에서 글을 썼고, 남편이 죽은 뒤로는 사회보장으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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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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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1월 20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17년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로 불린다. 등단 이후 김명순, 김탄실, 망양초, 망양생, 별그림 같은 필명으로 시, 소설, 산문, 평론,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발표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하는 등 외국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피아노를 잘 치고 독일어로 곡을 만들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여성 작가 최초로 작품집 『생명의 과실』(1925) 『애인의 선물』(1929 추정)을 펴냈으며, 신문기자,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공부와 집필에 힘썼으나 모욕적인 소문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글쓰기를 중단했다. 생의 마지막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1951년 도쿄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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