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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4171621
· 쪽수 : 188쪽
· 출판일 : 2025-07-01
책 소개
이 작업은 언제나 나와 어긋나는 나를 인정하면서 그 어긋남 위에서 조그마한 발버둥질이라도 벌여보려는 시도이다…… 행한 것을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쓴 것을 행하기 위한 쓰기인 셈이고 나를 빌려와서 쓰는 글이 아니라 글을 빌려와서 잠시라도 나를 살아가게 만들기 위한 시도이다…… _「그것을 쓰기」 부분
나는 대부분 그렇게 글을 썼고 그렇게 내가 쓴 글을 잊어왔다. 보면서 나는 나를 잊어가니까. 보고 있으면 잊힌다. (…) 그 옆에는 엄마 사진이 있다./나는 엄마만 본다. 엄마를 잊기 위해서. (…) 나는 관에 누운 엄마를 본다. 끝까지 본다./엄마란 엄마는 다 잊기 위해서. _「칠월은 앉아 있기 좋은 달」 부분
나는 종종 둘 이상의 나를 사는 것 같다
우리가 종종 둘 이상의 우리를 함께 살듯이
난다 출판사 시의적절 7월의 주인공은 시인 박지일이다. 『칠월은 보리차가 잘 어울리는 달』은 그의 첫 산문집으로 시 여덟 편과 함께 산문, 짧은 이야기와 일기, 단상 등을 실었다.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지일 시인은 ‘정물적으로 보이면서도 움직이고 있는 기체적인 시세계’로 심사위원을 매혹시키며 “지금 한국 시에 필요한 감각”으로 호명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모국의 오래된 곳과 먼 곳의 말을 찾아나서는 종횡무진’(이원)을 보여주며 ‘광활한 환유적 상상력의 폭’(김행숙)으로 미학적 실험을 계속해나간 그는 2021년 묶어낸 첫 시집 『립싱크 하이웨이』(문학과지성사)에서 ‘하나의 정황을 둘러싼 채 수없이 비껴가는,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이야기’라는 ‘물음의 자리에 우리를 데려다놓고 그 의미를 느리고 깊게 들여다보았다’(최가은). 또한 2024년 펴낸 두번째 시집 『물보라』(민음사)에서는 (아무것도 없음까지 포함하여) 가리고 선 그 너머를 보여주려는 문을, “믿음과 믿지-않음,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의 ‘부딪침’”(정원)을 반복하여 그려냈다. “땅에 박는 족족 쓰러지는 기둥일지라도 벌판, 허허한 저 벌판에 어디 한번 세워는 보겠다는 목적을 둔 발버둥질”(「물보라」)로서의 “고투의 기록”(채호기).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아무에게도 상대당하지 못하는 너.’ 트집거리가 없고 기어이 죽는 물보라. 짓밟고, 구르고, 모래를 씹고, 삼키면서, 끝을 “쓰면서”(「「물보라」와 상관없는 Thomas De Quincey」) 시인은 “쓰는 너를 발견”해냈다(「11月 30.1日」).
끝낼 수 없는 삶도 삶일까?
끝낼 수 없는 사랑도 사랑일까?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보면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될 짧은 메모. 그리고 내가 보아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되는 그뿐인 것(「끊으면서 버들은 버들을 시작한다」). 문을 열면 어느 날은 오대산 초입이고 어느 날은 두륜산 중턱인데. 그리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열 일이 없는 문이니까(「둘」). 쓰는 것은 본다는 것이고 나는 보는 것에 재능이 없다. 그래서 나는 (…) 나를 살아본다.(「여름 산책」) 서로 붙어 체온을 나누고자 하나 붙는 순간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이. 닿음과 떨어짐 또는 만남과 헤어짐의 영원 반복.(「한여름은 충치 같다고」) 그날의 만남을 바라본다. 그날의 만남도 나를 바라본다. 나는 점점 잊힌다. 그날의 만남은 점점 잊힌다. 우리는 잊히기 위해서 마주한다. 우리는 헤어지기 위해서 만난다.(「칠월은 앉아 있기 좋은 달」) 여름의 비는 때때로 모든 소리를 잡아먹는다. 여름의 방에서 나는 혼자다. (…) 나는 비와 상관없이 나를 쓸 수 있을까. 혼자와 상관없이 중얼거릴 수 있을까? 혼자인 내가 좋다고.(「나와 상관없는 빗소리가 나를 때린다」) 뱀은 진동을 늘 연습하는 방울 (…) 노래란 음과 가사를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떨림. 그것으로 충분하다고.(「떨보 K」) 곱씹다보면 받아들여지고 받아들이다보면 몸으로 닿게 된다. 그러면 쓸 수 있다. 쓴다. 쓰면 별것 아니게 되니까. (…) 소나무는 나와 관계없이 그저 해변에 서 있다. 파도는 나와 관계없이 밀려오고 밀려간다.(「칠월은 태안을 가기 좋은 달」) 당신이라는 옷을 훌훌 걸치는 엄마. 엄마라는 당신을 훌훌 때리는 비. 헛돼요.(「우산이 없어요」)
긴교스쿠이라 불리는 놀이는
종이 뜰채로 금붕어를 건지는 놀이
(…)
사방을 헤엄치는 금붕어를
낚으려고 시도하는 아이를 떠올리면 된다
이런 풍경은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것이니까
그것이 힘들다면 금붕어 대신 갖고 싶고
가지고 싶지만 또 가질 수는 없는 것을
떠올린 다음에
그것을 갈망하는 나와
병치시켜도 되겠다
이런 풍경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일 테니까 _「히구라시 그러니까 저녁매미」 부분
티브이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리가 엄청 작았다. 집중해서 들어야만 겨우 들렸다. 박광주랑 최혜경이 우리는 너나없는 나그네라고 했다.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했다.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계속 속삭였다. 그것도 좋았다. _「천안아산역」 부분
◎ ‘시의적절’ 시리즈를 소개합니다.
시詩의 적절함으로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제철 음식 대신 제철 책 한 권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는 2025년에도 계속됩니다. 열두 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써나가는 열두 권의 책. 매일 한 편, 매달 한 권, 1년 365가지의 이야기. 시인에게 여름은 어떤 뜨거움이고 겨울은 어떤 기꺼움일까요. 시인은 1월 1일을 어찌 다루고 시의 12월 31일은 어떻게 다를까요. 하루도 빠짐없이, 맞춤하여 틀림없이, 매일매일을 시로 써가는 시인들의 일상을 엿봅니다.
시인들에게 저마다 꼭이고 딱인 ‘달’을 하나씩 맡아 자유로이 시 안팎을 놀아달라 부탁했습니다. 하루에 한 편의 글, 그러해서 달마다 서른 편이거나 서른한 편의 글이 쓰였습니다. (달력이 그러해서, 스물여덟 편 담긴 2월이 있기는 합니다.) 무엇보다 물론, 새로 쓴 시를 책의 기둥 삼았습니다. 더불어 시가 된 생각, 시로 만난 하루, 시를 향한 연서와 시와의 악전고투로 곁을 둘렀습니다. 요컨대 시집이면서 산문집이기도 합니다. 아무려나 분명한 것 하나, 시인에게 시 없는 하루는 없더라는 거지요.
한 편 한 편 당연 길지 않은 분량이니 1일부터 31일까지, 하루에 한 편씩 가벼이 읽으면 딱이겠다 합니다. 열두 달 따라 읽으면 매일의 시가 책장 가득하겠습니다. 한 해가 시로 빼곡하겠습니다. 일력을 뜯듯 다이어리를 넘기듯 하루씩 읽어 흐르다보면 우리의 시계가 우리의 사계(四季)가 되어 있을 테지요. 그러니 언제 읽어도 좋은 책, 따라 읽으면 더 좋을 책!
제철 음식만 있나, 제철 책도 있지,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기획입니다. 그 이름들 보노라면 달과 시인의 궁합 참으로 적절하다, 때(時)와 시(詩)의 만남 참말로 적절하다, 고개 끄덕이시라 믿습니다. 1월 1일의 일기가, 5월 5일의 시가, 12월 25일의 메모가 아침이면 문 두드리고 밤이면 머리맡 지킬 예정입니다. 그리 보면 이 글들 다 한 통의 편지 아니려나 합니다. 매일매일 시가 보낸 편지 한 통, 내용은 분명 사랑일 테지요.
[ 2025 시의적절 라인업 ]
1월 정끝별 / 2월 임경섭 / 3월 김용택 / 4월 이훤 / 5월 박세미 / 6월 이우성
7월 박지일 / 8월 백은선 / 9월 유계영 / 10월 김연덕 / 11월 오병량 / 12월 고선경
* 사정상 필자가 바뀔 수도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 2025년 시의적절의 표지는 글과 사진을 다루는 작가 장우철과 함께합니다.
목차
작가의 말 나를 내가 반복하는 것 7
7월 1일 산문 나는 계속 칠월을 산다 11
7월 2일 산문 오늘은 7월 2일 그리고 1월 2일이다 15
7월 3일 산문 너무 슬프지 않게 27
7월 4일 시 방이 분류하는 몇 종류의 나 31
7월 5일 시 용소 계곡 35
7월 6일 산문 골화骨化 앞에 흰 백白 자가 붙으면 39
7월 7일 시 배꼽으로 간다는 꾼 45
7월 8일 짧은 이야기 쉿 51
7월 9일 일기 그것을 쓰기 55
7월 10일 산문 끊으면서 버들은 버들을 시작한다 61
7월 11일 시 손쓸 수도 없이 오장에 쓰이는 기록 67
7월 12일 짧은 이야기 둘 77
7월 13일 시 느낌표에 빚을 진 10인용 관광버스 81
7월 14일 산문 보리와 차 87
7월 15일 산문 서울기 91
7월 16일 단상 여름 산책 97
7월 17일 단상 면을 넘기는 목도 고되다는데 101
7월 18일 산문 나와 상관없는 빗소리가 나를 때린다 105
7월 19일 일기 안 함 못함 못함 그리고 안 함 111
7월 20일 시 거꾸로 선 매화나무 119
7월 21일 단상 한여름은 충치 같다고 123
7월 22일 산문 퇴근길에는 오르막을 오르며 생각한다 127
7월 23일 산문 칠월은 앉아 있기 좋은 달 133
7월 24일 시 떨보 K 141
7월 25일 산문 칠월은 태안을 가기 좋은 달 145
7월 26일 산문 히구라시 그러니까 저녁매미 151
7월 27일 시 꼬리연 161
7월 28일 단상 우산이 없어요 163
7월 29일 산문 조용만이 맴도는 169
7월 30일 일기 천안아산역 175
7월 31일 산문 뭐 했다고 벌써 팔월? 179
저자소개
책속에서
한동안 “진자가 나를 운동한다” “버들은 끊으면서 버들을 시작한다”고 되풀이하여 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를 체감하기가 힘이 드니까. 내게 나는 주도권이 없는 것으로 추측되니까. 이러한 추측도 슬슬 지겨운데 달리 방도가 없다. 수록된 어느 글에 실린 “끝낼 수 없는 장난도 장난일까?”라는 물음이 떠오른다. 나는 나를 끝낼 수 없다. 쓰면 쓰일 것이 쓰이는 것이고, 쓰인 것이니까 쓰일 만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내가 나를 유지하는 방법은 쓰기뿐일까?
―작가의 말 「나를 내가 반복하는 것」 부분
01시 45분 … 친구가 차를 끌고 온다고 한다 … 함께 창원으로 내려가자고 말한다 … 지금 출발하면 02시 30분 안으로는 내 집까지 올 수 있다고 말한다 … 02시 30분에 출발하면 06시 30분 안으로는 창원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01시 49분 … 너는 괜찮다고 말한다 … 괜찮다고 … 괜찮다고 … 괜찮아.
02시 04분 … 이제 조금씩 괜찮아진다 … 이제 현실이 조금씩 느껴진다 … 진짜로 엄마가 간 것일까? … 꿈이어라 … 꿈이어라 … 당연하게도 꿈이 아니다.
02시 05분 … 살지를 못하겠다.
―7월 2일 산문 「오늘은 7월 2일 그리고 1월 2일이다」 부분
보리차를 끓이기 시작한 지 꽤 됐다. 종일 마시는 것은 아니고 작업할 때만 마시는 보리차. 쓰고 보니 이질적이고 낯선 단어. 작업. 작업이라. 내가 하는 작업은 쓰기. 쓰는 것은. 시가 안 써질 땐 안 써지는 시에 대한 글을 쓴다. 안 써지는 시에 대한 글도 잘 안 써질 땐 일기를 쓴다. 일기도 안 써질 땐 어떡하나. 글쎄. 안 쓰면 되지. 쓰지 않다보면 쓸 것이 생긴다만. 그것도 힘들다면…… 관두면 어떨까. 관두면 다 끝날까?
―7월 14일 산문 「보리와 차」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