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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 인물
· ISBN : 9791195799763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16-12-17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1. 처음 복음 받은 이
2. 아버지와 아들
3. 외길을 향한 서원
4. 벼랑 끝을 걷다
5. 떠나라! 좌하면 우하리라
편집자 후기
참고자료
인터뷰로 도움 주신 분들
미주
저자소개
책속에서
옥진현은 예수를 믿고 가장 먼저 상투부터 잘랐다. 당시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왜 그의 행동이 자살행위에 가까운지 알려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대화를 추구하던 김홍집 내각은 주금주가 옥포교회를 세우기 바로 전 해인 1895년에 단발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단발령 발표는 김홍집 내각에 대한 지지 대신 국민들의 반발만을 사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持父母라’는 유교철학이 오랫동안 몸에 밴 백성들의 완강한 반발과 을미사변의 참극을 졸속으로 처리한 김홍집 내각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던 당시 단발령은 다름 아닌 친일의 상징으로까지 인식되었다. 게다가 강제 시행은 단발령을 을미사변과 더불어 반일 감정을 고조시킨 기폭제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투가 없는 머리는 신앙의 표현이라기 보다 오히려 공개적인 친일 선포로 보는 게 훨씬 더 타당했다. 상투를 자름으로 평생 속해있던 씨족 사회가 주던 혜택에서 스스로를 제외시킬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회가 주는 배척까지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게다가 옥진현은 별시위공파別侍衛公派 21대를 이어야 하는 장남이었다.
“나는 당신들이 친일파라고 욕을 해도 괜찮으니 마음대로 손가락질 하시오!”
옥진현의 손자이자 옥한흠의 작은 숙부인 옥치상(부산 성동교회 원로목사)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 할아버지가 상투를 자르고 옥 씨 마을에서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셨지.”
그러나 그에게 주변의 핍박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면한 진짜 문제는 삼거리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교회도 없었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도 없었다. 천상 주금주가 세운 옥포교회로 매주 가야만 했다. 차가 없던 당시 그 길은 무려 왕복 칠십 리의 엄청난 거리였다. 예배를 위해 새벽 동도 트기 전에 옥진현은 아내 한찬악(1857~1940)과 아들 옥관환(1889~1974)을 데리고 그 먼 길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뜨리지 않고 매주 다니기 시작했다. 왕복 칠십 리 그러니까 약 30킬로는 단지 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길은 평지가 아닌 산길이었다. 요즘 사람이라면 평생에 한 번을 걷기도 쉽지 않은 힘든 길이었다. 그런 고된 예배의 길을 옥진현 가족은 무려 몇 년간이나 지속했다. 그러던 중 옥진현은 마침내 또 하나의 옥 씨 가족을 전도했다. 몇 년 간 오로지 아내와 아들만 데리고 그 먼 교회를 다니던 옥진현에게 그 가족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기쁨이고 감격이었다. 두 옥 씨 가족의 신앙은 예배 참석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삼거리 뒷산 공동묘지 내 가묘를 하나 만들어 기도 장소로 정하고 시시때때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기도처는 ‘산기도뫼(묘)’라고 불렸다.
한창 입시를 준비하던 그해 5월에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거제도에서 입시준비를 하는 청년과는 별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역사의 한 사건은 생각지 못한 형태로 그에게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미 입영통지서를 받았던 옥한흠은 대학을 들어간 후 군대를 가기 위해 그동안 계속해서 입영을 연기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군사 쿠데타를 성공시킨 정부는 병역을 연기한 모든 사람들에게 당장 입대하라는 포고문을 전국에 내걸었다. 병역기피자가 되면서 대학을 갈 수는 없었다. 대학입학시험만 칠 수 있도록 조금만 영장이 늦게 나와주길 간절히 원했으나 고작 몇 주 차이로 영장이 날아왔고 일 년간 공부하던 입시 준비는 모두 허사가 된 채 논산 훈련소로 향해야했다.
사실 이미 또래보다 한참 공부가 늦었던 옥한흠에게 무려 삼 년의 군대생활은 대학생이라는 꿈에 대한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제겐 바울과 같은 사고의 패턴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제가 신학교 시절 부교역자로 섬기는 교회에서 장로와 부딪히는 바람에 쫓겨난 일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교회 앞에서 제 사임 광고를 하고는 장로님 눈치만 살폈습니다. 지금도 그 일에 대해선 후회하진 않습니다. 다만 아이 둘을 데리고 교회 앞으로 이사까지 왔는데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오죽 답답하면 개척할 데를 찾아 대낮에 불광동 지역을 돌아다녔겠습니까? 수중에 돈도 한 푼 없이 말입니다. 마침 주택 위로 조그만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에 100평 남짓 되는 공터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하면 어떨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그때 당시 제가 삼십대 초반인 점을 감안하면 참 한심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딱히 갈 길도 없고, 유학길에 오른다 해도 가족을 데리고 갈 형편도 못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겐 나름대로 소신이 있었습니다. ‘나는 잘못해서 밀려난 사람이 아니라 옳은 일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이야. 비록 그 교회를 섬긴 지는 일 년 십 개월 정도 밖에 안 되지만, 90여 명의 주일학교 아이들을 450명으로 부흥시킨 유능한 목사가 아닌가. 교회 앞에 마지막 인사를 할 때도 눈물바다가 될 정로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아내는 어찌할 바를 몰라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교역자에게는 가끔 그런 순간이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