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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6722050
· 쪽수 : 220쪽
· 출판일 : 2025-07-08
책 소개
“배수아는 하나뿐이다”
“배수아의 소설에는 상투적인 인물, 상황, 대사, 통찰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배수아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상황, 대사, 통찰은 오직 배수아의 소설에만 나온다. 그래서 배수아는 하나뿐이다”(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마음산책, 2018)
배수아의 텍스트는 낯설고 불안하고 불온하며 이질적이고 불길해서 오히려 쉽게 매혹당하고, 얼핏 그 독보적인 스타일만을 이야기하기 쉽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이만큼 예민하고 섬세하게 한 인간의 내면을 끄집어내 보일 수 있을까 갸웃거리게 만든다.
꽤 긴 시간 절판되었다가 새롭게 출간된 그의 네 작품에는(『철수(1998)』, 『이바나(2002)』, 『동물원 킨트(2002)』, 『독학자(2004)』 이러한 작가의 매력이 그대로 녹아 있는데다, 2025년 현재의 ‘배수아’라는 텍스트를 떠올릴 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 시절의 저 낯섦은 지금도 여전히 한없이새롭고, 작품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묘하게도 지금의 배수아와 겹쳐진다.
다시 한번,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저 ‘단언’은 작가가 등단한 지 삼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뿐더러,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세계로부터 격리당하고, 그리고 동시에 어느 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
나는 그곳에서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 그 이름은 책 속에서 나를 향해 스스로 걸어나왔다. 그 책은 내 상상과 사유의 결과물이며 나를 영원한 그 도시의 시민으로 기록한다. 나는 배에서 내려 안개 속에서 희미한 빛의 섬으로 떠 있는 도시의 광장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 나는 후회하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내가 떠나온 세계의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다시 볼 수 없으리라. _131~132p
모든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와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 떠나는 멀고 먼 산책
『독학자』 안에서 이즈음의 배수아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해 보인다.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지우며 자신만의 글쓰기를 선보였던 작가는, ‘대학교’로 상징되는 제도와 권위, 부조리, 이상적 진리와 영혼의 자유를 향한 주인공의 내적 투쟁을 거침없이 드러내 보인다. 198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를 향한 배수아의 독자적 목소리와 비판적인 시각이 매우 신랄하게 드러나 있으나 정작 작가는 “내가 애정을 기울여서 쓰고자 했던 것은 섬세한 영혼을 가진 한 고독한 젊은이의 내면세계였을 뿐, 마치 펜을 칼처럼 휘두르면서 남을 야단치는 식의 글쓰기는 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 하여, 『독학자』는 영혼의 자유를 위한 한 인간의 고독한 정신적인 투쟁을 찬미하는 매혹적인 소설일뿐더러, 이십여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려는 오늘의 모든 청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흔 살까지는 생계를 위해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눈팔지 않고 공부할 것이다. 나는 오직 공부에만 미칠 것이다. 마흔 살까지의 내 삶은 언제나 내가 꿈꾸던 교통수단이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구술언어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스무 살, 이제 그곳으로 나는 배를 타고 떠난다. 저녁의 광장에 희미한 불이 켜지는 시간이면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책을 펼칠 것이다. _175p
『독학자』가 출간된 2004년으로부터 우리는 꼬박 이십 년을 더 건너와 있다. 작품 속 화자가 건넜을 그 시간의 끝에 작가 배수아가 와 있는 것처럼 읽힌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작가는 수년 전부터 베를린 인근 한 시골 마을의 정원 딸린 오두막에서 읽고 쓰며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 시작부터 낯설고 새롭고 독창적이었던 그의 세계는 여전히, 더욱더 단단한 성을 쌓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은 더디게 흐르겠지만 초조해하지도 않으리라. 분명히 고독하고 틀림없이 두렵기도 하겠지만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러다 이윽고 마흔 살이 되면, 그때 나는 스스로 만든 대학을 졸업할 것이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분명한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겠다. _176p
무려 이십 년 전의 작품을 다시 읽으며, 작가의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 것은 동시대 독자에게도 큰 축복이 아닐까. 어떤 시간이 흐른 후, 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분명한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겠다”.
목차
독학자 9
작가의 말 215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의 얼굴은 그 자체로 아직 내가 만나보지 않은 어떤 세계, 아직 읽지 않은 한 권의 책이었으며, 그것은 내가 일순간이나마 느꼈던, 인간의 얼굴과 인격으로 드러난 시간에 대한
생애 최초의 긍정적인 인상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너무나 멀리 있게 된다. 상상력과 영감이 마음속에서 이글거리며 불타오른다. 나는 책을 펼쳐든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밤에 책을 읽는다. 오락거리가 없으며 대중적인 문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물을 죽이지 않고 과일과 야채를 주로 먹으며 강물 위로는 기다란 모양을 한 배가 소리도 없이 미끄러진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도록 그곳의 밤은 길고도 길며, 달빛이 사람들의 고요한 이마로 찾아든다. 사람들의 대화는 마치 라틴어 기도문과 같이 엄숙한 문법을 준수한다. 모든 사람은 오직 생계를 위하여 필요한 만큼만 일하며 필요한 것보다 많이 가지려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화려한 옷이나 번쩍이는 물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종교와 신성을 존중하기는 하나, 누구도 신자가 되지는 않는다. 문학과 예술을 너무나 사랑하나 누구도 그것으로 이름을 얻기를 욕망하지 않는다.
나는 생계를 위한 노동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노동이 삶의 수단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은 분명히 잊지 않을 것이다. (…) 노동은 삶과 함께 지속될 것이고 삶과 동시에 종말을 맞을 것이다. 나의 독서가 어떤 가시적인 성취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닌 오직 그 자체로서 목적인 것처럼 노동 또한 생계라는 원래 이외의 목적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