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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중기(임진왜란~경종)
· ISBN : 9791197402296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23-09-15
책 소개
목차
진실眞實, 이 책을 여러분 앞에 내놨다
기축옥사, 새로 쓰다!
차례
<발간사> 우리 역사의 민낯 … 기축옥사 실세 드러내다
유성룡과 임금 선조의 정치
기축옥사 어떻게 볼것인가?
기축옥사는 누가 주도했나?
서인인가 동인인가? 동인도 다 같은 동인이 아니었다
기축옥사, 누가 언제 주도했나?
조헌의 상소와 호남유생들의 상소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나?
주류 동인을 겨냥한, 조헌과 호남유생들의 상소
천민을 양민화 하는 개혁적 국방정책에 반대를 위한 반대
1년만에 드러난 일 - 광해 세자책봉
멈추지 않은 서인들의 호소
희생자는 누구인가? 주류 동인? 비주류 동인? 서인?
과연 ‘동인 1천명’이 희생됐을까?
희생자는 오히려, 비주류 동인과 서인들
기축옥사, 그 역사의 중심에 선 동인
이발의 노모와 어린자식을 누가 죽였나?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누가 죽였나?
‘최영경’의 죽음 논란
기축옥사 기간에 벌어진, 서인 탄압
임진왜란 직전, 정사 황윤길-부사 김성일 엇갈린 보고
기축옥사 중간 1년 동안, 서인 탄압 희생자 속출
전라도에서 계획됐다는 모반, 왜 황해도?
기축옥사 뒤 정치는?
임진왜란과 송강 정철
전쟁 중, 죽은 정철에게 가해진 동인들의 공세
기축옥사에 대한 냉혹한 평가
끝나지 않은, 역사왜곡
왜 송강 정철은 기축옥사 주도자로 몰렸나?
끝나지 않은, 역사왜곡
기축옥사 등 관련 인물들
참고자료
저자소개
책속에서
“기축옥사 발발 두 달 만에 유성룡 부각”
송강 정철에게 주어진 권한과 주도권이 ‘동인’에게로 넘어간다. 기축옥사가 발발하고 두 달 지난 뒤다. 정암수 상소, 양산숙과 김광운 상소, 조헌 상소 등 몇 가지 사건이 빌미가 됐다. 12월 8일 이후 급작스런 변화였다. 임금이 서인과 주류 동인을 인식하는 시각이 완전히 바뀐다. ‘유성룡 이산해는 금옥처럼 아름다운 선비’로, 송강 정철과 서인은 ‘악한 것들’로 바뀐다. 12월 14일부터 임금이 서인을 겨냥해 가시 돋친 말을 쏟아냈다. 그 말 속에는 “해괴하다”, “의심된다”, “죄를 물어라!”, “정철의 손에서 나왔다”, “인심의 패역(悖逆)함”, “이 지경에 이르렀다”, “웃을 일이다”, “간귀(奸鬼)이다”, “경멸한다”, “날뛴다.” “마천령을 넘게 될 것”, “체차하라!”, “추고하라!” 등 부정적인 말 일색이다.
반면 동인인 유성룡에 전한 말은 무한한 신뢰의 발언들 이었다. “백유양 초사가 경(유성룡)에게 무슨 관계 된단 말인가”, “경은 금옥(金玉)처럼 아름다운 선비다”, “경의 심지(心志)를 저 태양에 묻는다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것임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조금도 개의치 말라”, “마음을 편안히 가지라”는 따뜻한 메시지 일색이다.
이는 서인 정철 중심에서 동인 유성룡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 메시지였다.
“정권 잡은 동인들, 서인 대탄압”
송강 정철이 동인들의 함정에 빠진 ‘건저문제(왕세자 책봉문제)’로 1591년 윤3월에 파직된다. 송강 정철은 큰 위기에 몰리고, 서인들이 동인들에 의해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다. 중앙 요직에 있던 거의 모든 서인들이 탄핵의 대상이 된다. 정철과 가까운 서인계 인사들은 거의 모조리 ‘음험하고 간사한 무리들’로 치부돼 옷을 벗어야 했다. 정철의 문하생이거나, 정철을 두둔하거나, 동인들에게 대들거나 하면 여지없이 체직시키거나 귀양을 보냈다. 대대적인 탄압이었다. 당시 송강 정철은 ‘간신’ 취급을 받고 있었다. 1591년 7월, 정철의 모함에 얽혀 배척받은 사람이 있으면 모두 발탁하여 서용하라는 전교까지 내렸다.
“동인 몰락? 오히려 동인 정권, 공고히!”
정여립의 반란 모의 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는 결국 동인들을 몰락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동인계 정권을 공고히 다진 계기가 된다. 이때 정철도 좌의정에 오르지만, 벌써 기축옥사 발발 2개월 뒤인 12월 초중부터 임금 선조의 눈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사실상 정철은 정치적으로 실각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서인에 대한 불이익 인사는 물론이고, 임금 선조는 정철을 심하게 대한다.
정철이 기축옥사 발발 한 달여 만인 1589년 11월 8일자로 우의정 자리에 올라 ‘서인의 부활’이라는 신호탄을 쐈지만,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만인 12월 9일, 임금 선조는 “역적과 관련하여 의논이 과격한 사람은 제재하라”고 이산해에게 전교하면서 실권을 잃게 된 것이다. 정철의 권한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 선상에서 송강 정철을 실각시킨 세자책봉 문제인 ‘건저의 사건’이 나온다. 동인들에게는 눈엣가시였던 송강을 그렇게 몰아낸 것이다.
‘1,000여명의 동인계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라고 알려진 기축옥사는 동인이 중심이 된 정치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를 정철이 주도한 사건으로 몰아가고, 이를 확산한 측면이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