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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중기(임진왜란~경종)
· ISBN : 9791198810731
· 쪽수 : 356쪽
· 출판일 : 2025-08-09
책 소개
목차
서문 _ 역사 다시쓰다! 진짜 징비(懲毖)의 이름으로…
역사 연표
차례
임진왜란 전후 주요 역사 일정
표: 서애 유성룡 임진왜란 전후 행적
표: 충민공 양산숙 의병장 연보
표: 전란을 맞아 유성룡 동인 측 & 양산숙 서인 측이 보인 행적 비교
최악의 군주 선조와 백성의 고통
최악의 군주 선조, 그리고 그의 최측근
1592 조선은 지옥이 되었다; 역사가 만든 참극
1591 임진왜란, 예고된 참사였지만 외면했다
1555 위기의 시대, 양산숙이 전쟁을 대비한 이유
1587년 손죽도, 양산숙이 본 전쟁의 징조
1587 양산숙, 왜 사신 통해 조선의 위기 직감하다
봉쇄당한 개혁
1589 양산숙과 유생 50여 명은 왜 상소 했을까?
1590 유성룡이 보낸 전라도 관찰사 홍여순
1569 양명학 배척한 유성룡, 애초부터 개혁반대
1575 당쟁의 시작은 개혁에 대한 반발이었다
1579 더욱 심해지는 동인들의 공세
1573 유성룡, 젊은 선비들의 언로를 틀어막다!
1582 10만 양병 반대한 자는 유성룡이었다!
1583 노비 면천 놓고 갈등
1583 그들은 왜?
파행
1589 정철은 주도자가 아니었다-기축옥사의 진실
1589 유성룡-한준-최황에 쏠린 의문들
1589 기축옥사의 주도자는 오히려 유성룡?
1590 최영경 죽음과 숨은 방조자
1591 곧 전쟁인데, 대대적인 서인 탄압
1591 송강 정철 제거로 시작된 동인의 폭주
임진년, 희망의 싹
1592 유성룡의 방관 vs 양산숙의 결단
1592 전쟁 대비 막은 책임자들 처벌하라!
1592 임진왜란 - 양산숙, 가장 먼저 깃발 들다
1592 한양으로 가는 양산숙
1592 전쟁의 흐름을 바꾸다 … 양산숙의 의주 보고
1592 소 잃고서야 외양간 찾은 유성룡
1592 두 왕자 포로로 잡히다
1593 한양 수복과 포로 협상
진주에서의 슬픔
1593 진주성에서
1593 양산숙, 명나라 총병 유정을 만나다
1593 전투가 시작됐다
1593 혹시 유성룡 보셨어요?
1593 무너진 성, 처절한 죽음
1593 유성룡의 두 얼굴…왜장과 내통?
오독 오판
1593, 유성룡 복귀 직후… 정철 탄핵에 올인
1594 유성룡, 전쟁 중 1년 내내 죽은 정철 탄핵
유성룡, “남 탓” 민낯… 『운암잡록』에 담긴 이중성
1594 무서운 정치…유성룡 의병들을 죽이다
1596 또 의병장 김덕령과 김언욱을 죽이다
1597 이순신까지 … 유성룡의 치명적 오판
1594 의병에 충격적인 막말 … 유성룡의 민낯
누가 영웅인가?
1597 진주성의 숨겨진 영웅, 양산숙!
1597 누가 나라를 지켰나? 양산숙 vs 유성룡
저자소개
책속에서
여러분, 혹시 ‘충민공 양산숙(梁山璹)’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낯설게 느껴지신다고요?
그렇다면 ‘서애 유성룡(柳成龍)’은요? 아마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징비록》의 저자’, ‘명재상’, ‘이순신을 도운 인물’, ‘난세의 영웅’, ‘백성을 위했던 개혁가’ 같은 찬사를 아무런 의심 없이 떠올릴 겁니다. 그의 책 《징비록》은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되고, 수많은 리더십 도서는 그를 “이 시대의 롤모델”로 소개하죠. 유성룡은 마치 의심할 여지 없는 ‘불멸의 영웅’처럼 우리 역사에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감히 묻습니다. “유성룡, 그는 정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웅일까요?” 이 책은 바로 이 불편한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유성룡은 무능한 군주 선조의 최측근으로 있으면서 과연 어떤 정치를 펼쳤을까요? 그는 정쟁에 몰두했고, 거의 모든 개혁을 가로막았습니다. 양명학의 유입을 차단했고, 율곡 이이 등의 개혁안도 끝내 저지했습니다. 기축옥사 당시엔 조정의 실권자로서 선량한 선비들과 그 가족들을 탄압하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국난 앞에서도 그는 국가적 대비를 방해했습니다. 6만 명이 희생된 진주성 전투조차 외면했고, 전쟁 중에도 정쟁에만 몰두하며 송강 정철을 또다시 제거하려 했습니다. 이산겸 의병장, 김덕령, 김언욱, 김응회를 포함한 수 많은 의병들이 그의 손에 의해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파국의 정점은 이순신의 해임이었습니다. 이는 유성룡과 김홍미 등 유성룡 라인이 자행한 명백한 정치적 폭거였습니다.
반면, 충민공 양산숙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무명의 유생이었지만, 누구보다 먼저 전쟁을 예견했고, 철저히 대비했으며, 가장 먼저 일어섰습니다.
유성룡이 율곡 이이의 개혁을 가로막을 때, 양산숙은 국경 붕괴와 민심 동요를 직시하며 분노했습니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상소를 올렸습니다. “유성룡을 버려야 조선이 산다!” 하지만 이 상소는 “재상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묵살당했고, 유성룡은 오히려 임금의 귀를 막고 눈을 가려, 조선을 아무런 대비 없이 전쟁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결과는 나라의 파국이었습니다. 조선 인구 60%가 사라진 참극이 벌어집니다. 전쟁이 터진 뒤, 양산숙은 가장 먼저 창의(倡義)했습니다. 곧바로 의주 행재소를 찾아가, 의병과 관군이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담은 구체적 전쟁 대책안을 임금에게 보고했습니다. 그의 보고는 절망에 빠진 조정에 희망의 불씨를 되살렸고, 전쟁 분위기를 단숨에 되돌리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진주로 달려가 명나라 참전을 도모하며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했고, 전국 전장을 누비며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라를 지켰습니다. 끝까지 백성과 함께 싸웠고, 결국 죽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이름을 잊었습니다. 그의 공은 기록되지 않았고, 그의 정신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