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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91197998553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22-12-10
책 소개
목차
엮는 말 • 4
O씨 • 8
사기사 • 12
겨우 눈을 뜰 때 • 22
소설 급고 • 72
목숨 • 84
대동강은 속삭인다 • 121
유성기 • 148
최 선생 • 153
폭군 • 173
몽상록 • 197
책속에서
이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교만한 ○씨가 이즈음 한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외다. ○씨가 매일 ○○은행으로 다닐 때에 그의 맞은편에서 오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 보기 싫어서외다. 그 ‘어떤 사람’은 코를 잔뜩 하늘로 쳐들고 ‘이 세상에 나밖에 사람이 어디 있어’ 하는 듯이 뚜거덕뚜거덕 걸어옵니다. ○씨는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목이 저절로 어깨로 수그러들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개자식!”
그 일이 생각날 때마다 ○씨는 스스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분한 마음은 삭지를 않았습니다.
하루 아침은 ○씨는 오늘은 꼭 그 자식을 흘겨 꺼꾸러뜨리리라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그는 조반을 먹은 뒤에 시간을 맞추어가지고 길을 나섰습니다. 어디 보자. 그는 마음을 결박해가지고, 늘 그 모르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곳까지 걸어갔습니다. 즉 그 사람은 저편 모퉁이에서 ○씨의 편으로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역시 그 사람의 코는 하늘로 향하였습니다. 입에서는 담배의 연기가 가장 자기 주인을 경배하는 듯이 너울너울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씨도 힘을 다하여 눈을 흘겼습니다. 충혈된 그의 눈은 아프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씨의 눈 같은 것은 이 세상에 그 존재의 여부조차 모른다는 듯이 태연히 걸어갔습니다.
‘또 모욕당했다.’
- ‘O씨’ 중에서
“미안합니다. 잠깐 속였습니다.”
“속여?”
“네. 그…… 영업상 거짓말을 조금 했습니다.”
”거짓말을 해?”
“네. 용서해주십시오.”
이전에 차에서 사기꾼을 잡은 일이 있었다. 내 뒷주머니에 사람의 촉감을 느끼고 빨리 그리로 손을 돌리매, 웬 사람의 손이 하나 붙잡혔다. 그때 그 손의 주인이 애원하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눈을 보고 나도 말없이 눈으로 한번 꾸짖은 뒤에 슬쩍 놓아주었다.
오래 잡기를 벼르던 인물이로되 급기야 잡고 그의 애원을 들으매 경찰까지 끌고 갈 용기가 안 생겼다.
그래서 나는 몇 마디 설유를 하였다. 영업상 값을 속이는 것은 혹은 용서할 수가 있으되, 부리의 행세를 하면서 부녀자나 무식한 사람들만 있는 데를 골라 다니며 억지로 팔아먹는 것은 용서하지 못할 일이니, 이 뒤에는 아예 그런 행사는 하지 말라고…….
그날 밤, 아내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잡는 맛이 여간이 아니외다. 잡는 맛이 그만하다면 또 한 번 속아 보았으면…….”
- ‘사기사’ 중에서
이즈음 충분히 자지 못하고 맛있게 먹지 못하고 고민으로 날을 보내어 무한 몸이 약해진데다가, 어젯밤에 한잠을 못 이루고 오늘 또 그 사람과 먼지 틈을 꿰이고 온 금패는, 사실 그네 뛸 용기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힘없이 그넷줄을 바라보았다. 줄에는 쌍그네 뛰던 홍련이와 산월이는 벌써 내리고 새 계집애가 올라가서 한창 뛰고 있었다. 뒤로 거반 땅과 평행으로까지 올랐다가는 ‘쉬―’ 하는 소리와 함께 너울너울 나비와 같이 펄럭이며 앞으로 솟아오르고 그럴 때마다 소나무는 그루까지 부러질 듯이 흔들린다. 가지는 우적우적하였다. 그러고 만약 그 가지가 한번 부러만지는 지경이면 그넷줄 위에서 즐겨하던 그 계집애는 당장에 송장으로 변할 것이었다.
이것을 보는 때에 금패는 어제 청류벽 위에서 떨어져 죽은 계집애를 생각하였다. 하루살이와 같다. 이슬과 같다. 실낱같다. 또는 봄 꿈과 같다. 예부터 인생이란 것을 폄한 여러 가지의 경구가 있었지만 그 백만의 경구가 과연 어제 그 한순간의 사실을 나타낼 수가 있을까.
- ‘눈을 겨우 뜰 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