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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91198117953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23-02-10
책 소개
목차
엮는 말 • 4
장미 병들다 • 8
기우奇遇 • 39
여수旅愁 • 71
하얼빈 • 146
상륙 • 165
황제 • 173
향수 • 205
여인旅人 • 224
홍소哄笑 • 228
황야 • 234
책속에서
그러나 막상 휘줄그레한 보라 양복에 땀에 절은 모자를 쓴 가련한 그를 대하였을 때 현보는 준구에게 그것을 부탁하였던 것을 일순 뉘우쳤다. 휘답답한 그의 꼴이 자기의 꼴과 매일반임을 보았던 까닭이다.
그래도 의젓한 걸음으로 층계를 걸어올라 식당에 들어가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고 음식을 분부하고 난 후, 준구는 손수건을 내서 꺼릴 것 없이 얼굴과 가슴의 땀을 한바탕 훔쳐냈다.
“양해하게. 집에는 아이들이 들끓구 아내는 만삭이 되어서 배가 태산 같은데두 아직 산파도 못 댔네. 다달이 빚쟁이들은 한 두럼씩 문간에 와서 왕메구리 같이 와글와글 짖어대구―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이제는 벌써 자살의 길밖에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없네……. 별수 있던가, 또 교장에게 구구히 사정을 하구 한 장을 간신히 둘러 왔네. 약소해서 미안하나 보태 쓰도록이나 하게.”
봉투에 넣고 말고 풀 없이 꾸겨진 지전 한 장을 주머니에서 불쑥 집어내서 현보의 손에 쥐여주는 것이다. 현보는 불현듯이 가슴이 찌르르하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손안에 남은 부풀어진 지전과 땀 배인 동무의 손의 체온에 찐득한 우정이 친친 얽혀서 불시에 가슴을 죄인 것이다.
- ‘장미 병들다’ 중에서
나는 다시 놀랐다. 그러나 침착한 태도로 그를 위로하고 굳은 결심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일찍이 상당한 액을 변통하여 가지고 와서 주인과 담판하여 모든 일을 결정하기로 굳게 약속하여놓고 그곳을 나왔다. 번잡하던 도회는 고요히 잠들고 이역의 밤은 깊었다. 취중에 정신없이 헤매던 거리지만 맑은 정신에는 극히 단순한 거리였다. 나는 손쉽게 거리거리를 빠져서 멋마침내 밤 이슥히 박 군의 숙소를 찾았다. 경성행을 하루 동안 연기하기로 하고 이튿날 아침 일찍이 나는 박 군의 호의로 상당한 금액을 수중에 차고 박 군과 같이 어젯밤 그곳을 찾아갔다.
수면 부족으로 흐린 나의 머릿속에는 전날 밤 일이 마치 필름같이 전개되었다. 생각하고 생각하여도 계순의 이때까지 운명이 너무도 참혹하였다. 그러나 생활이란 항상 ‘이로부터다’. 이로부터 사람답게 뜻있게 살아간다면 그만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을 억지로라도 밝게 생각하려 하였다.
쑹화 강을 옆으로 끼고 어제 걷던 거리거리를 찬찬히 찾아 내려가면서 결국 그곳까지 갔다.
- ‘기우’ 중에서
“물론 기다려는 보지만 암만해도 수상하단 말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자꾸만 들면서.”
아킴과 마리의 두 사람은 밤 연기 시간까지도 물론 나타나지 않아서 그날 밤 무대는 엉망이었다. 소년 소녀의 출연이 없는데다가 아킴의 기타와 그나마 마리의 〈아리랑 타령〉이 빠지게 되니 연기의 차례는 흠뻑 줄어지고도 흥 없고 쓸쓸한 것이었다.
남은 단원들이 쓸쓸한 무대를 흥성하게 할 양으로 갖은 애를 다 써야 원체 사람의 수효가 부족함은 어쩌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관객석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불만의 소리가 들리고 조롱의 고함이 터져 나올 때 단원들은 보기에 딱하리만치 겸연해서 얼굴을 붉히고들 했다. 그 모양으로는 같은 무대를 남은 며칠 동안이라도 옳게 지탱해나갈 성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무대 성적보다도 더 긴급한 것이 아킴과 마리 두 사람의 종적이었다. 대체 어디를 갔는고 어떻게 되었는고 해서 아마도 그날 밤이 새도록 일단의 걱정은 삐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음 날 오전 내가 소식을 물으러 호텔로 가기 전에 빅토르는 일찍이 영화관으로 나왔다.
“여기도 물론 소식이 없지요.”
“막 호텔로 갈랴던 차였소.”
“대체 웬일일 것 같소. 무슨 대책은 없으시오.”
- ‘여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