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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한국정치사정/정치사 > 한국정치사정/정치사-일반
· ISBN : 9791198378200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23-07-30
책 소개
목차
서문/ 4
1장·특검 수사팀장 윤석열, 서울중앙지검 검사장 윤석열,
그는 무슨 일을 했는가/ 9
2016년 특검/ 12
적폐수사/ 40
『나직경(羅織經)』의 세계/ 60
2장·법가란 무엇인가/ 85
법가 사상과 그 정책/ 87
신이 없는 나라 – 중국/ 102
법가의 관점에서 본 민(民)/ 107
순리(循吏)와 혹리(酷吏)/ 112
3장·지식인의 탐욕, 지식인 통제/ 119
과거제 도입/ 120
과거제로 멸망한 명 왕조/ 127
청의 멸망 과정/ 146
이조의 지식인 통제/ 159
지약(知弱)으로 멸망한 나라/ 181
4장·대한민국의 이조화/ 185
법원과 검찰/ 186
대한민국 교육의 본질/ 209
에필로그 – 역사의 굴레/ 226
저자소개
책속에서
2016년 특검
<생략>
윤석열은 2016년 이른바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검에서 특별검사실 수사팀장이었다. 특검인 박영수와 특검보 4인이 상관이었으나 윤석열이 수사팀장으로서 모든 것을 결정했다.
<생략>
이해를 돕기 위해, 거의 같은 역사적 전례(前例)를 소개한다.
이성계 일당은 위화도 회군 후 온갖 모략과 사기협잡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이를 간략히 다룬다.
1388년 6월 3일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 회군이 성공하여 최영과 그의 측근들은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사흘 후인 6일 밤 우왕은 회군 주동자 이성계, 조민수, 변안열을 죽이고자 내시 80여 명을 무장시키고 이들의 집으로 갔으나 모두 군을 이끌고 야외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성계가 최영의 딸인 왕비를 내어놓으라 하니 우왕은 거부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강화도로 축출했다.
이어 신왕 옹립 단계에 들어갔는데 이성계는 우왕의 친자인 왕창(王昌)을 세우기를 꺼려하여 종실 가운데 선택하려 하였으나 조민수는 우왕의 친자를 세우려 하였다. 당시의 명유(名儒)인 이색이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여 9세의 왕창이 즉위하였다. 이때는 요동 원정에 출정한 36명의 원수가 건재한 때였으므로 이성계가 신왕 옹립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창왕이 즉위하자 조민수는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 도통사, 이성계는 동북면·삭방·강릉 도통사가 되어 군 통수권을 양분하였다.
창왕이 즉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박의중이 명의 예부 자문(咨文 : 같은 등급의 관청 사이에 오가는 공문)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 자문에서 명 태조 주원장은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영토 문제는 상세히 살핀 후 결정될 것이라 하였다. 이는 사실상 고려의 요구를 수용한 완곡한 표현이다. 중도에 그쳤으나 고려의 요동 원정이 이러한 성과를 가져온 것이다.
7월 조민수가 창녕으로 유배되었다. 『고려사』에는 조준의 탄핵에 의한 것으로 간략히 기록되어 있으나 이성계와 군 통수권을 양분한 조민수의 실각이 이렇게 간단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민수 제거로 홀로 도통사 직위를 보유하게 된 이성계는 원수들을 제거하기가 용이해졌다.
8월 이색은 문하시중, 이성계는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이성계는 7남 이방번(李芳蕃)을 종실인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딸과 혼인시켰다. 왕우는 신종(神宗)의 7대손이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며 종실을 추대하려 했는데 창왕의 즉위로 일단 좌절되었다.
그 직후 불과 8세의 이방번을 종실과 혼인시킨 것으로 이는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할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성계와 인척인 종실을 왕으로 추대하는 것은 찬탈로 가는 한 과정으로 기획되었다. 요동 원정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전하였으며 위화도 회군에 반대하였던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李元桂)는 아우의 찬탈 의사를 확인하고 10월 23일 음독 자결하였다. 그가 남긴 절명시가 전한다.
삼한고국에 이 몸 둘 곳 어디이뇨 三韓故國身何在
지하에 가 태백 중옹을 좇아 놀고 싶구나. 地下願從伯仲流
같은 처지에 처신함이 다르다 마오, 同處休云裁處異
형만 가는 바다에 뗏목을 띄울 필요도 없으리. 荊蠻不必海浮桴
이원계는 이자춘(李子春)의 첫 번째 처인 한산 이씨의 소생이었다. 이원계는 홍건군 격퇴에 공을 세워 수복경성공신과 기해격주홍적공신이 되었다. 우왕 7년(1381)의 황산대첩(荒山大捷)에 공을 세워 추충절의보리공신(推忠節義輔理功臣) 칭호를 받고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판개성부사, 문하시랑평장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제1처는 문익점(文益漸)의 딸이고, 제2처는 경효왕(공민왕)의 측근 김용의 딸이다. 경효왕의 아낌을 받아 김용의 반역 때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원계의 장인 문익점은 엄청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고려사』 「열전」에 실려 있지 않다. 이는 이성계의 찬탈에 반대한 때문이다. 최무선(崔茂宣) 역시 같은 이유로 『고려사』 「열전」에 실려 있지 않다. 이성계의 찬탈에 반대한 이들은 거의 다 『고려사』 「간신 열전」에 들어가 있다. 문익점과 최무선은 「간신 열전」에 넣기가 너무 어려워 아예 빠져 있다.】
이성계의 창왕 폐위 의도를 감지한 문하시중 이색은 고심 끝에 명나라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10월 이색은 첨서밀직사사 이숭인, 동지밀직 김사안(金士安)과 더불어 하정사로 떠났다. 처음 이색이 늙고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청하여 사신으로 가려 하자 창왕을 비롯하여 모든 관료들이 만류하였다. 이색은 어린 왕에게 그의 의지를 밝혔다.
신은 포의(布衣 : 평민)로 벼슬이 최고위에 달하였으므로 언제나 죽음으로 이에 보답하려 하였습니다. 이제 죽을 곳을 얻게 되었습니다. 설사 길에서 죽을지라도 시체를 가지고 중간 역할을 하여 나라에서 위임된 바가 천자에게 전달될 수만 있다면 비록 죽어도 오히려 산 것입니다.
<이하 생략>
- <본문> 중에서 발췌